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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교 독서 수행평가를 위해 리처드 도킨슨의 <신 없음의 과학>이라는 책을 읽었다. 당연히도 나는 특정 종교를 비난할 생각은 없으며 무신론과 종교적 논쟁을 떠나서 단지 책을 읽은 후 명료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신 없음의 과학> 중에서 이슬람교에 대해 언급했던 부분이 있었다. 종교에 대해서는 무지한 나지만, 이때만큼은 책을 읽으며 이슬람교에 대해 한번 곱씹어보게 되었다. 내가 이전까지 어렴풋이 희미하게 알고 있던 이슬람교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종교가 삶의 상당 부분에 뿌리내리고 있는 중동의 한 갈피’였다. 이 책을 읽은 후 바뀐, 결국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중점은 현재 국제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이슬람교가 창시 초기에는 건강하고 반듯한 종교였다는 것이다.
초기에 건강했던 이슬람교를 보며 문득 우리나라의 ‘유교’가 함께 끈에 묶여 올라오듯 함께 떠올랐다. 분명 우리나라도 조선 건국 때만 보아도 성리학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로 일컫는 ‘유교’를 광범위하게 적용했다. 하지만 그 끝은 어땠는가? 시간이 흐르고 변질된 학문은 결국 각종 사회불평등과 문화의 악습, 공동체의 상처만 가져왔을 뿐이다. 아마 이는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을 아는가? 우습게도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딱 들이 맞도록 정반대의 상황을 나열할 뿐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든 물 흐르듯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결국 내가 도달한 고뇌의 끝은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부패하고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였다.
영원이란 존재할까?
변하지 않는 건 있을까?
부패하고 변질되지 않는 것은 없을까?
무엇이 이 세상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일까?
당장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명료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 시간이 지나면, 더 나이를 먹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며 혹은, 어쩌면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곱씹고 떠안은 채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언가 부패되고 변질될 때, 그 시작에는 분명 누군가의 이기심, 욕심이 끼어들어 있었고, 분명히 어딘가엔 관여했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타인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 야망, 혹은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타당성 같은 검은 마음이 모이고 모여 고이고, 고인 게 끝끝내 넘쳐흐르며 , 결국 흐르는 강이 되고 광활한 바다가 되어 지금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 바다의 , 그 강의 시작점을 알아내면 다시 부패되기 전, 변질되기 전의 순수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나치게 낙관적이면서도 스스로를 깊은 무언가까지 몰아가는 는 생각을 하며 나는 오늘 하루도 행복에 더 가까이 다가갔고, 나 스스로 오늘하루 행복을 머금었다고 자랑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