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기다리는 일은 설레는 일이며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다. 때를 기다리는 일은 인내 없이는 힘들다. 춘추전국시대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 위인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삶은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사람들, 때로는 조롱의 대상인 이들이 시련을 견디고 한편으로 철저히 준비하여 결국 한 시대를 풍미했다. 위인들이 오랜 기간 인내하며 기다린 힘의 원천 무엇일까? 간절함과 절박함이다. 이성부 시인의 시 <봄>을 읽어보자.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 이성부
봄을 희망이나 꿈, 목표라고 해보자. 그것이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온다면, 기막힌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사기]를 보면 진짜 그런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싫건 좋건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들, 귀족 집안 태생이라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산 사람들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공정과 능력주의로 논쟁이 한창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실력으로 성취한 것이니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훌륭한 뒷받침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쟁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 사람에게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워’야 온다. 절박하고 간절한 바람(wish)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철저한 준비다.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며 문왕을 기다린 강태공은 일흔두 살이 될 때까지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나루터에서 지내며 하는 일이라고는 독서와 낚시뿐이었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잘 잡지도 않았다. 강태공이 드리운 낚시에는 바늘이 없었다. 바늘이 있지만 곧게 펴져 있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물고기를 잡으려고 낚싯대를 드리운 것이 아니니까. 강태공은 낚시터에서 물고기가 아니라‘때’를 기다렸다.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만나 재능과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으려고 기다렸다.
문왕을 만나기 전까지 강태공은 어떻게 지냈을까.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한 강태공은 천문, 지리, 병학(兵學) 같은 온갖 학문에 능통한 천재였다. 하지만 학식과 통찰력 그리고 큰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오로지 책만 읽으며 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러다 보니 집안 살림에 도통 관심이 없는 강태공 대신 아내 마 씨(馬氏)가 모두 떠맡게 되었다.
어느 날 강태공은 여느 때처럼 책에 파묻혀 있었다. 비가 오거든 마당에 널어놓은 강피(곡식의 한 종류)를 꼭 거두라고 신신당부한 아내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소나기에 그만 강피를 모두 쓸려 보내고 말았다. 이에 진절머리가 난 아내는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갔다.
혼자서 살림까지 도맡은 강태공은 오십이 넘도록 여관에서 허드렛일하면서 힘들게 살았고, 그 뒤로는 백정 일을 했는데 도마 위에 놓은 고기가 썩을 때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마침내 위수 가로 옮겨 낚시를 시작했고 오랜 세월 기다림 끝에 문왕을 만났다.
당시 중국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달기 치마폭에 싸여 폭정을 일삼아 민심이 크게 동요하던 때였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다. 이와 반대로 덕망 있는 문왕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다스릴 인재를 찾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전 사관 편(編)에게 점을 치게 했다. “위수에서 사냥하면 장차 큰 것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닙니다. 장차 패왕을 보필할 스승이며 그 공이 3대(代)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은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위수로 사냥을 떠났고, 강태공과 극적으로 만난다. 비록 낡은 옷의 초라한 늙은이가 낚시하고 있었지만 문왕은 한눈에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절박하고 간절하게 미래를 준비해야
절박하고 간절한 바람(wish)으로 미래를 위해 철저히 준비한 사람을 한 명 더 만나보자. 연(燕)나라 소왕(昭王)이다. 연소왕이 제나라에 복수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인재를 불러 모아 준비한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연 소왕은 난을 당하여 제(齊)나라에 크게 패하자 원한을 품고 단 하루도 복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라가 작고 먼 구석진 곳에 있어 제나라를 제압할 힘이 없었다. 이에 몸을 낮추고 인재를 존중했는데 먼저 곽외(郭隗)를 예우하여 유능한 인재를 초빙하려 했다. 연소왕이 스스로 몸을 낮추고 사람들을 후대하여 어진 자를 불러드린다는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인재들이 연나라로 들어왔다. 악의가 위나라에서, 추연이 제나라에서, 극신이 조나라에서 찾아왔고, 숱한 선비들이 다투어 연나라로 몰려들었다. 연왕은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면 일일이 찾아가 조문하고 유족을 위문하는 등 신하들과 함께 기쁨과 고통을 같이했다. 소왕은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제나라에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다.
당시 제나라는 강력하여 남쪽에서 초나라에 이기고 서쪽으로 삼진(三晉)을 관진(觀津)에서 무너뜨린 다음 마침내 삼진과 함께 진(秦)나라를 격파했으며, 조나라를 도와 중산을 멸하고 송(宋)나라를 격파하여 땅을 1천 리 넘게 넓혔다. 이에 제나라 민왕은 교만해졌고 백성들은 잦은 전쟁을 견뎌내지 못했다. 이에 연 소왕은 악의에게 지금 제나라를 정벌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악의의 답은 이랬다.
“제나라는 땅이 넓고 사람은 많아 혼자 공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왕께서 기어이 제나라를 치시겠다면 조나라, 초나라, 위나라와 함께 공격해야 합니다.”
이에 악의에게 조 혜문왕(惠文王)과 맹약을 맺게 하고, 별도로 사람을 보내 초나라, 위나라와 연합하게 한 다음 조나라를 통해서 제나라를 토벌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진나라를 설득하게 했다. 제 민왕의 교만과 포악함을 미워하던 제후들은 모두 다투어 합종하여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악의가 돌아와 보고하자, 연 소왕은 군대를 총동원하고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았다. 조 혜문왕은 상국(相國)의 도장을 악의에게 주었다. 악의는 이에 조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 연나라의 군대를 함께 통솔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수(濟水) 서쪽에서 제나라를 격파했다. 제후의 군대는 철수하여 돌아갔으나 연나라 군대와 악의는 계속 뒤쫓아 제나라 도성 임치(臨菑)에 이르렀다.
제 민왕은 제수 서쪽에서 패하자 달아나 거(莒)를 지키고 있었다. 악의는 홀로 남아 제나라를 돌며 공격했고 제나라는 모두 성을 거점으로 수비에 들어갔다. 악의는 임치로 공격해 들어가서 제나라의 보물과 제기 등을 모두 취하여 연나라로 보냈다. 연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몸소 제수로 가서 군대를 위로하여 상을 내리고 잔치를 베푸는 한편 악의를 창국(昌國)에 봉하여 창국군(昌國君)으로 불렀다. 이어 연 소왕은 제나라에서 노획한 것들을 거두어 연나라로 돌아왔고, 악의에게 다시 군대로 함락되지 않은 제나라의 성들을 평정하게 했다.
악의가 제나라에 남아 전투를 벌인 지 5년 동안 제나라의 70여 개성을 점령하여 군현으로 삼아 연나라 소속으로 삼았고 거(莒)와 즉묵(卽墨)만을 남겨 놓았다. 오랜 준비 끝에 복수에 성공한 것이다.
발묘조장(拔苗助長)이란 말이 있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중국 송(宋)나라에 어리석은 농부가 있었다. 모내기한 후 벼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궁금해서 논에 가보니 다른 사람 벼보다 덜 자란 것 같았다. 농부는 궁리 끝에 벼 순을 잡아 빼보니 약간 더 자란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온종일 벼 순을 빼느라 힘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자 식구들이 깜짝 놀랐다. 이튿날 아들이 논에 가보니 벼는 이미 하얗게 말라 죽어버렸다.
때로는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조급하지만 할 수 없다. 그냥 넋 놓고 있는 게 아니라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살리려면 준비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지금 기다리는 순간이 내 앞에 도착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잘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자.
강태공 역시 자신 뜻을 알아줄 현자를 기다리며 학문과 수양에 매진했다. 자신의 성공과 명예, 부귀영화보다 남을 잘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았다. 10년 동안 3,600개의 낚시를 버리면서 때를 기다린 것이다.
강태공이나 연소왕이 지쳐 포기했다면, 언제 찾아올지 모를 ‘자신의 때’를 끝내 기다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위인들은 오랜 세월 준비하며 때를 기다렸고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 고 ‘더디게 더디게’ 오지만 준비하고 기다리면 ‘마침내 올 것이 온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당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