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자살'이라는 단어는 내게 더없이 아프게 다가온다. 엄마의 부고를 듣고 한달음에 온 넷째 이모는 이제 더 이상 엄마가 아프지 않을 거라는 말로 우리 가족을 위로해주셨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나는 엄마의 선택에 내가 끼친 영향은 없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 지독하게 자라나는 생각의 가시를 조금이나마 끊어낼 수 있었던 건 니나 부슈만을 만나고부터였다.
"이런 감정을 가져 본 일 없어, 언니는? 여태까지 애착하고 있던 무엇이 갑자기 지긋지긋해진 일이? 하루도 참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거야. 모든 것이 전과 꼭 같아. 방도, 집과 거리도. 그런데 갑자기 우리에게 그것이 변한 것같이 보이고 밉고 참을 수 없이 쓸쓸하고 적의에 찬 것으로 보여. 그러면 우리는 떠나야 하는 거야. 그럼 일각도 지체 없이 떠날 때가 온 거야. 자기도 모르게 우리는 벌써 이 모든 물건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끌어내어 간 거야."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 부슈만의 자살 시도를 보면서 어쩌면 엄마가 진정한 자유를 원한 건 아닐까 싶었다. 병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말이다. '자살'이라는 선택은 삶의 한가운데서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일 수 있으며 고통까지 기꺼이 사랑할 줄 아는 삶에 대한 완벽한 집중으로서의 방법일 수 있다는 걸, 린저의 소설을 통해 알게 됐다. 고통과 격정에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수도 없다. 죽는다는 것은 마지막 헌신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엄마는 안락사를 원한다고 수없이 말할 정도로 아픈 몸의 고통을 처절히 감내하고 계셨다. 엄마처럼 니나는 자살을 실험이라고 규정해 삶의 결정권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귀속되게 만들었다. "너에게는 생을 끊으려는 이 시도도 삶의 일부인 것이다. 이것은 너의 정신과 생명력이 너에게 부여한 새로운 뉘앙스이며, 하나의 충격이며, 깊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며, 일종의 실험인 것이다." 니나의 말대로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삶을 비켜" 간, "한 번도 모험을 하지 않"은, 그래서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엄마와 니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의 한가운데』의 니나는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남성을 구원하는, 지고지순한 여성 캐릭터가 아니다. 일찍이 이 책을 국내에 번역한 전혜린은 니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형되고 초월화된 또 하나의 자기를 흰 종이 위에 창조하는 과제에 온 정열과 지성을 기울이고 있는 니나에게, 남성이란 그림자와도 같이 지나가 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남자, 연애 이런 일은 나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니나는 종종 말하고 있고, 나는 통과의 기분을 느낀다고도 말하고 있다. (중략) 남자뿐 아니라 여자라 할지라도 그러한 투기 없이는 결코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도 결혼이라는 신기루에 속지 말라는 것, 결혼 속에 도망가더라도 결국 계산서는 뒤늦게라도 오고야 만다는 것"(전혜린 유고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중에서 ).
20대의 니나는 약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다. 약혼자는 짐짓 이해하는 척 결혼을 강행하지만 니나의 외도는 남자를 계속 짓누른다. 남자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첫 아이를 출산한 직후의 니나를 강제로 임신시킨다. 자궁으로 전락해버린 여자 니나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어쩌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의 엄마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라는 말로 나에게 경고를 보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법칙이 있고, 저기에는 삶이 있다는 식은 정말 끔찍해. 우리가 하는 것은 반대인데, 우리가 삶을 극복하면 좀 더 높은 삶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일까?"라고 내게 질문하며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라는 말을 하며 지금쯤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를 기억한다. 그 음성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테다. "그것은 자기가 내리려 했던 섬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음성이었다. "배가 멎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릴 때 그 선객은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섬을 바라보면서도 선장에게 항로를 섬 쪽으로 돌려 달라고 하기 위해서 종을 흔들지 않는다. 눈에 안 보이는 팔이 그를 붙들고 있고 그는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배는 계속해서 가고 섬은 대해의 한가운데에 그냥 떠 있다. 그 섬에는 다시는 어떤 배도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니나는 간 것처럼 엄마는 갔다. 죽음이라는 광선이 엄마 곁에 가득했는데, 나는 미처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매달 엄마를 위해 대리로 처방받는 마약성 진통제를 어쩐 일인지 엄마는 다음에 가져다 달라고 했다. "다음에 타면 안 될까?" 엄마는 조심스레 그렇게 물었는데, 한 달에 한 번 한 시간 거리의 병원을 가는 걸 그렇게도 귀찮아했던 나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을까. 그 부채의식 때문에, 매일이 엄마에겐 다만 손실로 느껴져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는 떨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니나는 생을 너무나 사랑하고 꽉 껴안은 사람만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생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노여워하지도 못한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차라리 모험을 택해 전부를 기꺼이 잃으려고 하는 자가 진정으로 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엄마는 너무 최선을 다했기에 스러진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죽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뭇 생명들이 꺼지고 켜지는 이 세계에서, 이런 글을 쓰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이겠지만 사랑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갔던 엄마의 삶을, 뒤늦게라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는 나의 시도는.
어쩌면 삶이란 이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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