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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Jun 15. 2020

사랑을 읽고 직업을 얻다

봄알람은 ‘현실에 즉각적으로 개입해 여성의 삶을 바꾸어낼 수 있는 시도를 하자’는 신조 아래 동시대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의 말들을 책으로 펴낸다. 여기서 편집자로서 가장 신경 써서 해내려는 역할은 ‘지금 필요한 페미니즘 이슈를 대상 독자에게 호감을 주는 형태로 출간하는 것’이다. 욕심을 덧붙이자면 이 호감이 단순히 ‘저 책 갖고 싶다’는 느낌을 넘어 ‘지금 나한테 저 책이 꼭 필요해!’라는 감각이기를 바란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책 만들기를 업으로 삼아 소소한 욕심을 채우는 요즘이다. 대개는 일하기 싫다며 끙끙대다가 드문드문 보람찬 순간을 느끼면서 노동을 지속하는 흔한 전문직 사람 1이다. 하는 일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갈팡질팡하지만 그렇게 쌓이는 경험을 평범하게 소중히 여긴다. 최근 ‘편집자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대략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연극에서 연출의 역할과 비슷한 것 같다.” 말하고 돌이켜보니 꽤 정확한 정의였다는 느낌이다. 저자의 ‘글’을 어떤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 것인지를 정해서 전략에 따라 정돈하여 ‘책’이라는 상품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독자가 이러저러한 정보를 가지고 이러저러한 공감대 속에서 책으로 입장할 수 있도록 어떠어떠한 내용의 서문을 써주세요”라고 저자께 부탁하기도 하고, 어떤 순서, 어떤 중요도로 읽혀야 한다며 디자이너에게 세세한 조판 수정을 요청하고 있으면 어두운 무대에 조명을 설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연출과 관련해 최신간 『김지은입니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에서 생전 처음 해보는 짓을 하기도 했다. 책은 부제가 말하듯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의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한 피해생존자 김지은 씨의 치열한 기록이다. 재판 과정 동안 가해자 측이 조직적으로 퍼뜨렸던 온갖 거짓 선동을 넘어 비로소 피해 당사자가 직접 말하는 그간의 진실이 담겨 있는데, 그중 4장에는 피해자가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단상이 일기처럼 이어진다. 독자에게 그대로 읽혀서 이 밀도가 온전히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중간 중간에 여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밭게 이어지는 저자의 고통을 곱씹으며 읽는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궁리를 하다가 책 페이지를 찢었다. 표지의 노트 콘셉트를 적용해 본문 디자인 제안을 하고, 조판 상태에서 디자이너와 화면교를 하면서 ‘여기부터 이만큼 찢자’ ‘찢자’ ‘여기 더 찢자’ 이렇게 해서 숨 쉴 자리를 만들었다.


사진제공_봄알람


독자들이 당황스럽지 않았을지, 어떻게들 받아들였을지 아직 이 부분을 콕 짚은 언급을 보지는 못했지만 ‘편집에도 울림이 있다고 느꼈다’는 독자 피드백이 이 의도를 같이 느껴주신 것이리라 희망해본다.


책이라는 물건을 보는 관점도, 편집 일에 대한 생각도 계속 변화하고 있지만 어쨌든 책과는 상당한 인연이다. 이 직업을 갖기 전과 같이 놀이처럼 책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내가 만든 책을 놀이처럼 즐기는 독자들을 만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게는 내가 만든 책들이 남는다. 『유럽 낙태 여행』에 대해 ‘심각한 주제를 여행기로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독자 리뷰(외웠다)를 뿌듯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신청하기 위해 서류를 쓰면서 책을 간만에 다시 들춰봤다가 감동 받아서 사무실에서 울었다(세종도서는 떨어졌다). 『대리모 같은 소리』를 낼 때 원제 “대리모: 인권 침해”를 직역하지 않은 것은 진지함을 조금 덜어내 허들을 낮추면서도 제목만으로 슬로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실제로 관련 이슈가 뜰 때마다 ‘미쳤나? 대리모 같은 소리 하네’와 같이 여기저기서 숙어처럼 사용되는 것을 볼 때 홀로 미소 짓곤 한다.


마지막으로 취미와 사랑을 이미 잃었으니 직업인으로서 야심이나마 적어본다. 아래와 같은 상황이 언젠가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꿈이다.


“페미니즘 공부하고 싶어요. 책 추천해주세요!” “봄알람 책 다 괜찮으니까 한번 찾아보세요.” “와. 이것도 재밌어 보이고 저것도 재밌어 보이네요〜!” 그리고 그 책이 정말로 그에게 기쁨이 되기를. 내가 누군가가 만든 책들을 그토록 사랑했던 것처럼.



- 사랑을 읽고 직업을 얻다, 이두루 봄알람 대표, 기획자 노트 릴레이 시즌 2 36회 연재, <기획회의> 513호(2020. 6. 5 발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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