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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화작가 김동석 Sep 27. 2024

동심의 만화경!/김희자 작가

착각에 빠진 동화  426

동심의 만화경!






<환희의 춤>

동심의 만화경을 통해 환희의 춤을 추게 만드는 작품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가며 작품 속으로 들어갔다.

어딘가에 있을 블랙홀처럼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만화경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의 세계가 환희의 춤을 추게 한다.

나무와 거울의 조화가 만화경을 만들고 그 위에 작가의 영혼이 채색된 것을 느낄 수 있다.

끊어진 것 같은데 이어지고 이어진 것 같은 데 끊어진 것을 붙잡고 파동의 선을 따라 걸어간다. 그 끝은 어디일까 궁금했지만 착각이었다. <뫼비우스 띠>처럼 끝이 없는 우주의 본질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신비!

블랙홀!


환희의 춤은 누구나 리듬을 타고 출 수 있다.



환희의 춤/혼합재료 그림 김희자/메타갤러리 라루나



작가는 삼각형을 좋아할까!

아니면

동심의 만화경이 삼각형이어서 작품 또한 삼각형으로 했을까.

김희자 작가의 작품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나무를 거꾸로 보면 사실 모든 나무는 삼각형 모양의 입체도형이다.

피라미드가 안정감을 가진 삼각형이라면 생명을 가지고 역동성을 가진 나무는 모두 역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인간이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듯 나무 또한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역삼각형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비의 삼각형!

김희자 작가의 동심에서 시작된 만화경이 만들어낸 신비한 삼각형 속에 우주가 갇혔다.

그 우주를 보면

또 보고 싶은 충동에 빠지고 환희의 춤을 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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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을 관조하다>


세련된 곡선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나이테가 아닌 나무의 무늬를 찾아낸 다음 창의성이 돋보이는 선의 파장을 확장과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성을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이 고스란히 이어진 작품이다.


소나무!

그 내면의 이야기가 된 <무상을 관조하다> 작품을

눈과 귀를 열고 작품 앞에 서서 소나무의 이야기에 경청한다.

한 그루 소나무가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모습의 작품은 다양성을 보여준다.


박진감

역동성

긴장감


같은 것은 찾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성(한국적인 것)

창의성

시대성

독자적 특수성


같은 것은 작품이 품고 있는 고유의 가치이며 예술적 가치라 할 수 있다.

<무상을 관조하다>의 작품 한 그루 소나무는 곧 작가이며 자신의 영혼이다. 

때론

국가이며 정부이고 한국의 미(美)이기도 한다.

파동의 시작점이 곧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한 그루 소나무 속에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수많은 기록들의 산물처럼 보였다.

작가의 시선으로 끊어진 파동의 선을 찾아 잇고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시간 속에서 작가의 머리와 손이 보여준 열정이 곧 한국적인 예술작품으로 탄생된 것이다.

세련된 곡선은 자연스럽게 파장을 일으켜 무늬목으로 자리하며 작가의 선택을 기다린다.


<무상을 관조하다>

작품에서 해와 달과 별들의 이야기를 품은 소나무의 말을 경청(傾聽)해보자.

소나무는 세월의 흔적을 파동을 일으켜 가며 기록하고 확장해 갔다.

소나무가 의도하지 않아도 파장의 선은 확장하며 새로운 영역 표시를 하며 보란 듯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작가의 머리와 손은 공통점을 찾아야 했다.

한국적인 것과 예술의 가치를 높여줄 창의성을 찾아가는 힘든 과정의 연속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또 많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수십 장의 무늬목이 필요했다.

겹겹이 쌓인 무늬목이 선과 흐트러진 무늬가 하나의 의미가 되고 이미지가 되기 위한 노력은 수없이 반복되는 여정의 결과물이다.


누가!

소나무 무늬에 관심 가졌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던 소나무가 소멸의 시기를 맞이하며 남겨준 것을 사람의 손길이 또 다른 생성의 연속성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켰다.

작품 속 한 그루 소나무의 역동성이 평면화된 자신의 몸 일부에 새겨진 의미를 읽으며 몸부림쳤다.


"아!

내 살은 이렇게 생겼구나.

아니

내 마음과 가슴은 또 깊은 파장을 내며 살아왔구나.

나는 몰랐다.

마음이 움직이고 가슴 뛰던 순간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뒤돌아 본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무상을 관조하다>의 작품은 자신을 뒤돌아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무상을 관조하다/혼합재료 그림 김희자/메타갤러리 라루나




18세기

정선의 <인왕제섹도>에나 나올 듯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서히 움직이는 파동 경청하고 있다.


창의성

한국성

시대성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창의성이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의 시작이고 중심처럼 느껴진다.

김희자 작가의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은 예술가의 열정과 창의성이 돋보였다.

작가의 열정이 높아도 작품의 창의성이 빛나지 않으면 예술성이 결여된다.

작가는 또 한국의 소나무를 찾아내고 그 내면의 소나무 무늬에서 돋보이는 한국적 파동의 연속성을  볼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한 <한국적 특성>을 쉽게 말한다면 <한국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적인 것의 광범위한 것에 비추어 보면 소나무 한 그루와 내면의 무늬가 빚어낸 파동만으로 설명하기란 어려운 문제다.

과거

박수근과 김환기 같은 작가의 쉬운 한국적인 것과는 다른 것 같지만 김희자 작가의 한국적인 소재와 채색은 창의적 한국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미술사!

역사의 어딘가에 자리한 작품을 보면 대중은 한국적인 창의성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김희자 작가의 <무상을 관조하다> 작품은 한국적인 소나무를 통해 내면의 파동과 채색으로 예술의 창의성을 높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무상을 관조하다> 작품은 한국 미술사의 대표작으로 충분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파동의 무늬에서 현실적 시대성과 예술적 시대성을 모두 음미할 수 있다.

움직이는 선(線)의 파동을 통해 삼국시대와 고구려시대의 예술성을 볼 수 있다.

나무 판의 무늬에서 보듯 소박한 예술성은 선(線)의 흐름에 따라 요동치고 잠잠해지곤 한다.


파동의 채색은 경계를 만들며 새로운 관조(觀照)의 시작을 이어가며 새로운 창의성이 시작되는 점을 말해준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소나무 한 그루는 작가의 영혼이며 관조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소나무의 겉과 속의 형태를 들여다보는 관점은 생각하는 사람의 품격을 말한다.

곡선의 미(美)를 연출하는 파장의 형태는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소나무가 자라며 만들어가는 파장의 형태는 예술적 가치와 창의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움직이는 선(線)의 미(美)로 정의할 수 있는 예술적 창의성이 뛰어난 작품이며 한국을 대표할만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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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퀘렌시아>


두렵다!

온몸이 떨려온다.

폭풍우 치던 밤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작가의 손놀림은 곧 마법의 손이 되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하다.

아니

어딘가는 폭풍우가 내리고 있을 것이다.

천둥과 번개가 리듬과 멜로디를 연출하며 파동의 시작을 알리면 그 뒤를 따라 폭풍우가 내렸다.

붓은 섬세한 빛을 통해 두려움과 공포를 연출하고 우주의 삼라만상을 작품 속에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다.



폭풍의 퀘렌시아/혼합재료 그림 김희자/메타갤러리 라루나



노을빛을 연상하게 만드는 작품의 하단 부분은 지극히 평화롭다.

인간의 이성이 간절함으로 변한 듯 잠잠하고 고요의 시간을 음미할 수 있다.

그런데

작품 중간의 블루의 파동은 폭풍의 중심답게 강한 에너지와 인상을 연출한다.

김희자 작가의 열정이 넘치는 색의 조합니다.

퀘렌시아!

아직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의 하늘이다.

언제 폭풍이 몰아칠까!

시작은 또 어디서 할 것인가.

하늘이 아름다운 것 뒤로 숨은 언어의 마법을 작가는 즐기고 있을지 모른다.


<폭풍의 퀘렌시아>

작품명이 주는 언어의 마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작품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

고요의 안식처 같은 곳에서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다면 더더욱 잠잠한 하늘의 폭풍우는 거세질 것이다.


나무가 춤추는 환희의 만화경 앞에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김희자 작가의 작품 앞에 오래 머물고 싶다.










2024년 11월 09일까지

김희자 작가의 전시는 청담동 <메타갤러리 라루나>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들어는 봤는가!/김희자 작가 (brunch.co.kr)


김희자 작가 작품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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