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주말에 가을 여행을 가자는 문자였다. 가을 여행이라. 나는 어디를 잘 돌아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또 어디를 안 가는 스타일도 아니다. 어디를 갈까 하느냐 물어보니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 어떠냐는 답이 왔다.
배흘림기둥의 그 무량수전, 고려시대에 세워진 목조건축물로 유명한 사찰을 가을 여행으로 가보자는 문자에 마음이 설렜다. 고려시대에 살았던 나무로 지어졌다는 천년의 나무 흔적이 보고 싶어졌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나무로 지어진 배흘림기둥과 이맘때 타오르듯 붉은 절집 앞의 단풍도 보고 싶었다.
남편이 짠 스케줄은 마음에 들었다. 토요일 새벽에 떠나 부석사 무량수전을 탐방하고 풍기의 온천 호텔에서 묵은 후, 무심 마을을 걷고 풍기역 앞 청국장 맛집에서 나물 한가득한 밥상의 점심을 먹고 귀가하는 일정이었다. 주말에 밀릴 고속도로를 생각하면 핵심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월요일 출근이라는 결말로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전날 금요일 저녁에 절인 배추와 양념을 몇 개만 사서 버무리는 간단한 김장을 하고 가려는 나의 생각에 누구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퇴근 무렵에 이미 일주일을 버티던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는데, 도우미로 변장할 남편을 믿고 겁도 없이 김장을 하고 떠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몇 개만 버무리면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과 이왕 여기저기 양념을 묻힐 바에야 아예 조금 더 하자는 욕심이 더해졌다. 주말에 쉬엄쉬엄 김장을 해서 먹어야겠다고 사둔 수육용 통삼겹살이 냉장실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도 마음을 부추겼다.
배추와 양념을 미리 주문한 것도 아니어서 김장시장이 열리는 농협 하나로 마트로 퇴근을 했다. 막상 절임배추를 보니 어찌나 탐스럽던지 김장 후의 먹음직스러운 김치를 상상하며 해남 절임배추와 양념을 넉넉하게 샀다. 딸에게 오늘 저녁은 수육이라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배추는 속이 노랗게 알차고, 양념도 딱 알맞게 짭조름해서 팔이 아픈 줄도 모르게 배추 속을 넣었다. 수육이 삶아지는 동안, 아이들에게 보내줄 김치를 먼저 통에 바쁘게 담고 나니 그제야 본격적으로 팔과 허리가 아파왔다. 자식들이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픈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가 부지런히 김치통을 나르고, 이런저런 뒷일들을 빛의 속도로 마무리해 주지 않았으면 40킬로의 김치를 한 시간 안에 버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침 딸도 도착해서 수육을 자르고 저녁밥상을 차렸다. 양념은 똑 떨어졌고, 배추 한 포기가 남았길래 대충 찢어 참기름만 둘러 김장그릇에 남은 양념에 무친 겉절이는 맛있었다. 배추 자체가 맛있었고 수육도 알맞게 부드러웠다. 음식이 맛있으면 식구들의 대화도 맛있는 얘기로 가득해진다. 맛있다고 한 마디씩만 해도 다섯 명이 모였으니 다섯 마디를 훌쩍 넘어 이야기가 흘러넘쳤다.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허리에 파스를 척 붙이고 나니 바닥난 줄 알았던 체력이 다시 샘솟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김장은 몇 날을 소비하던 노동이었는데, 나의 소소한 김장은 그저 버무리기만 하면 되니 감사한 일이다. 고단하기도 하고 이른 아침에 영주로 떠날 기대감에 눈을 잠시 감았다 떴는데 이미 새벽이었다.
가을 여행이 시작되는 아침 공기는 푸릇하고 맑았다. 영주라는 지명이 예쁘고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내려가는 길도 낯설지 않았다. 일산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퇴계원 쪽 방향으로 곧장 영주를 향했다. 굽이굽이 펼쳐진 산등성이들은 또 얼마나 다정한지 운전하는 남편은 나 몰라라 하고 나는 갈색으로 변해가는 산과 나무의 가을 모습에 매혹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일을 벌여 결국 파스 냄새를 퐁퐁 풍기는 아내가 차창밖 풍경에 연신 감탄하는 모습이 그에게는 행복이었을까. 별 말도 없이 운전하는 남편은 그 절을 지었다는 나무처럼 듬직하다. 나는 한 곳에서 오랫동안 생명을 살아내다 제 몫의 생명으로 사라지는 나무의 속성을 좋아한다. 고려시대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목조 건물인 부석사가 목적지가 된 것도 나무로 지어졌다는 이유다.
부석사로 올라가는 길은 빨간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람의 시간은 거침없이 전쟁의 역사를 기록했지만 단풍나무며 은행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서 매년 단풍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소백산을 배경으로 한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길은 오르막 외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저마다의 사는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오르막을 오르는데 양 길가에는 장사꾼들이 도열하듯 모여있었다.
어느 유명 관광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우리 부부는 개의치 않고 목어가 걸린 범종을 지나 돌계단을 여러 차례 올라 마침내 무량수전에 닿았다.
세월이 만져서인지 맨질맨질해진 기둥들을 감싸않은 빈 공간의 절집 댓돌에는 불자들이 벗어놓은 신발로 가득했다. 부석사라는 절의 이름이 돌이 떠있는 곳이어서 부석사라고 지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사람들의 마음 한 자락이 아름다운 색깔을 입힌 목어와 탁 트인 경치를 따라 가라앉기를 바라며 나는 무량수전의 돌 위에 앉아있었다. 가을답지 않은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풍기역 앞의 밥집의 청국장은 맛있었다. 갓 지은 밥에 뜨겁게 끓여낸 된장찌개와 손맛이 느껴지는 김치 겉절이 한 가지, 그냥 아무런 나물반찬 한 가지만 있어도 훌륭한 우리의 밥상인데 정성껏 준비한 반찬들이 모두 각각의 맛을 냈다. 다시 영주를 오게 된다면 밥이 맛있어서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과를 샀다. 길을 지나다가 어느 사과밭에서 주인장이 그냥 상자에 담아둔 못난 사과들을 샀다.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열매의 모양과 크기에 현혹되지 않는다. 맛이 있던 없던 열매를 맺기까지의 나무의 시간을 먹는 것이 감사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먹은 상품성 없어 보이는 못난이 사과는 꿈속에서도 나올 것 같은 완벽한 사과맛이었다. 달고 시원하며 아삭했다.
돌아오는 길은 길고도 지루했지만 좋았던 순간들이 겹치고 겹쳐져서 어느 가을날의 그리움이 될 것을 알았다. 가을이 몹시 아름답던 지난 주말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