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깨지진 않을 거야

by 해봄

요즘 '서울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의 대상자로 선정되어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처음엔 그저 MMPI-2(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 검사를 지원받고, 내 상태에 대한 해석을 원해서 심리검사를 지원받았을 뿐인데......!


MMPI-2 결과, 정신건강 고위험군에 선정되었다며,

심리상담 대상자로 심리상담을 받게 된 것이다.

심지어 무려 7회기나 되는 상담.

지금까지 1회성의 상담만 받아온 나는 좀 설렜다.




1회기 때는 상담의 목적, 원칙, 방향, 비밀보장 및 예외사항에 대한 안내를 받았고,

개인적으로 상담 분야에 관심이 있어 마치 실습생의 반짝이는 시선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반짝이는 시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쨌든 내 우울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자면, 트라우마가 되었던 특정 사건을 빼고 설명할 수 없는데...

처음 만난 상담사 앞에서 가슴이 저미도록 아픈 트라우마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게.......!

눈에서는 미처 맺힐 새도 없이 눈물방울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건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도 그 아픈 사건을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나 왜 예전처럼 펑펑 울고 있지?

이제 항우울제 많이 먹어서 눈물도 덜 나야 하는데?


상담사님은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는,

"지금까지 괜찮아진 척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한 마디를 남기셨다.

머리를 한대 쿵 맞은 기분이었다.

아..... 나 지금까지 괜찮아진 척한 거구나!
느끼는 그대로 티 내고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아직 더 연습해야겠구나

2회기에는 초기 경험 파악을 위한 이야기를 나눌 테니, 초기 경험을 떠올려보라는 과제를 안고 돌아왔다.




나는 머릿속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유치원생 시절과, 초등학생 시절의 일부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가온 2회기.

기억이 나는 최대치를 말씀드렸다.

상담사님과 유년시절의 경험과 상황, 그 상황에서 내가 느꼈었던 감정을 추측해보고, 어떤 과정을 거쳐 내가 이러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찬찬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와중에 난 유아교육 전공,

유아교육의 핵심은 발달심리학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상담이 빠르게 착착 진행되었다.


나는 무려 어린 시절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방어기제로써의 행동이었음을, 그중에서도 어떤 방어기제였을지도 스스로 추측해볼 수 있었다!


2회기 상담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

상담사님께서는 따뜻하고 위트 있는 한 마디를 던지셨다.

우리 해봄님은 유리구슬 같아요.
네??? 왜요???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고 정직하게 살아오셨는데,
유리구슬이 깨질까 두려워 긴장을 많이 하시는 듯해서요! 스스로를 지키려 애쓰는 지금 모습처럼,
어려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경험으로 몸에 밴 해봄님의 삶의 방식이지만 트라우마 계기로 심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 너무 맞는 말이어서 대답을 못 하겠네요ㅎㅎ
요즘 유리는 기술이 좋아져서 방탄기능도 있는걸요! 그냥 놔둬도 막 굴려도 잘 안 깨져요!
해봄님은 그저 생긴 대로 맑은 유리구슬로 살아도 괜찮아요. 생각보다 쉽게 깨지지 않을 거예요!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깨지진 않을 거야'

뭔가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며 한바탕 서로 눈웃음을 주고받은 뒤 상담실을 나왔다.



나는 이제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내게 찾아온 우울을 애써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며 살아볼 작정이다.

유리구슬을 보호하려 애쓰지도 않을 거고,

우울이 내 약점이 될까 두려워 감추지도 않을 거다.

남들이 유리구슬을 아무리 굴리고 던져도

있는 그대로의 우울이 드러난 유리구슬을 외면해도

신경 안 쓸 거다.


쉽게 깨지지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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