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살자
한국은 뭐든지 쉽게 퍼진다.
인터넷이 없는 조선시대, 식민지시대에도 그랬다는 기록이 많다.
그렇게 남 따라 하고 서로 비교하는 문화가 원래부터 심했다는데,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복작복작 사니까 그런 것 같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18101293081
이러한 비교문화는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 있는데, 보통 그 이유를 SNS에서 찾는다.
하지만 나는 SNS보다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 의무화"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부동산 가격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사람들이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그 의도는 굉장히 좋다.
2006년 1월 1일부터 의무화되었고, 만 17여 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자리 잡아서 손쉽게 부동산 거래 가격을 찾아볼 수 있다.
이걸 이용한 프롭테크도 굉장히 발전해서 호갱ㅇㅇ, 아ㅇ 등과 같은 부동산 사이트나 어플들도 많다.
부동산도 주식처럼 분석하고 설명하는 전문가들도 엄청 많아졌다.
그전엔 복부인이나 복덕방 아줌마, 아저씨들이 다였다.
부동산은 데이터 기반이 아니라며 주식에 비해 투자 세계에서 폄하당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 의무화"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제도지만, 이걸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어떨까?
솔직히 옛날에는 신문에 나오는 부동산 아니면 남의 집 값 잘 몰랐다.
누가 어디 산다고 해도 대충 이미지만 알지 그 가격까진 알지 못했었다.
집들이를 가거나 내가 사는 동네나 지인들이 사는 동네에 놀러 가야지만 대충 얼마구나 했을 뿐이다.
누군가의 집값을 정확히 알려면 해당 지역 부동산에 가서 봐야 하는데 누가 그런 수고까지 해가며 알아볼까.
그런데 지금은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누가 어디를 샀다더라 하면 그 집이 얼마인지 너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 그 격차가 더 크게 다가온다.
난 평생 모으지 못할 것 같은 액수가 찍혀있는 걸 보면 삶의 의욕만 꺾인다.
옛날처럼 "난 꼭 저 집에 들어가서 살 거야!"하고 결심을 할 수가 없다.
당장 내 연봉으로는 몇억 하는 저 집을 사기에 너무 까마득하다.
시도할 엄두조차 안 난다.
사실은 부모님 세대에도 집은 언제나 비쌌다.
그런데 그분들이 집을 살 수 있었던 건 집값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분들은 그냥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금 당장 할 일을 하면서,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매매로 옮겨가다 보니 현재에 이르게 된 게 아닐까.
차라리 모르면 약일 텐데, 요즘은 모를 수가 없으니 문제다.
그래서 나는 SNS보다 '부동산 실거래가 공개'가 더 해로울지도 모르겠다 싶다.
그래도 장점이 더 많은 제도를 없앨 순 없으니,
이런 시대에 내가 할 일은 내 인생을 사는 걸 테다.
누군가가 매일 어딘가의 신고가를 정리해 주고,
전국 아파트 가격 순위를 매겨주고,
보기 좋게 그래프로 만들어 배포한다고 해도,
나는 내 인생을 살면 된다.
남들이 어떻게 살든 어디에 살든 그건 내버려 두자.
나는 내 눈앞의 일들을 해치우고 나에게 집중하자.
까마득하게 긴 도로를 매일 청소하는 베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