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거친 바다에서 살아 돌아와도 남는 건 회사 일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지구는 둥글다.
그래서 대권항해라는 걸 한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을 갈 때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제일 빠르다.
비행기도 그래서 그런 항로로 날아간다.
일본 열도 사이를 지나 러시아 캄차카 반도를 따라 올라가면 베링해가 나온다.
적도 바다 위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다는 대표적인 농담과 비슷하게 베링해에서 북극곰을 봤다는 이야기도 단골로 나오는 곳이다.
진짜로 적도 위에 빨간 줄이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나도 베링해에 떠다니는 얼음 위에 서 있던 북극곰을 봤다고 기회만 있으면 떠벌리고 다닌다.
요즘은 진짜로 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ㅎㅎㅎ
겨울의 태평양은 태풍이 불지 않아도 춥고 거칠다.
여름의 태풍은 기상 예측 분석이 좋아 그나마 피해 갈 수 있는데 겨울은 그냥 전반적으로 바다가 거칠기 때문에 답이 없다.
그런데 그때가 특히 더 심하게 안 좋았다.
왜 그렇게 날씨가 나빴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하필이면 우리 배가 공선이라 타격이 더 컸다.
치솟는 철강 가격에 기회를 본 회사에서 어렵게 따낸 계약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진행하기 위해 이번 항차는 화물창이 텅 빈 공선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배가 가벼우면 그만큼 파도에 휩쓸리기 쉽다.
배가 하도 흔들리니 식사는 빵이나 라면 같은 걸로 대체되었다.
근데 솔직히 그 와중에 뭘 먹을 생각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안 먹으면 힘드니 꾸역꾸역 욱여넣을 뿐이었다.
브릿지 당직을 서는데 요령이 없어 중심을 잃고 앞구르기 뒷구르기를 몇 번씩 했다.
자려고 침대 위에 누워도 굴러 떨어지니 바닥에 드러누웠지만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황천항해법을 써도 도무지 나아지지가 않았다.
갑판 위에 파도가 무시무시하게 들이닥쳤다.
배의 속력은 거의 나지 않았고, 어쩌다 멀리 가끔 보이는 다른 배의 사정도 비슷해 보였다.
그럼에도 조금씩 가야 할 곳으로 가긴 했다.
이리저리 휩쓸려도 목적지가 분명하니 어찌어찌 가게 되더라.
연안 근처로 와서야 겨우 안정세를 찾아갔다.
이제 살았나 보다 싶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건 새하얗게 얼음으로 뒤덮인 갑판이었다.
추운 날씨에 파도가 치고 또 치니 갑판 위에서 그대로 얼어버린 것이었다.
당장 한국에 들어가면 접안도 해야 하고 화물 작업도 해야 하는데 모든 장비가 엄청 두껍게 얼어있었다.
비상이 걸렸다.
기관부까지 동원되어 얼음을 깨고 녹여야 했다.
우선은 갑판 위에 길부터 만들고, 해치커버(화물창 덮개)를 열 수 있게 연결 부위를 녹이고, 선수에 있는 접안 라인을 위한 윈치와 앵카링을 위한 윈드라스 등 꼭 필요한 부분들만 골라 작업을 했다.
할 일이 태산 같지만 이 진귀한 광경에 모두들 인증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나도 작업복을 껴입고 사진을 찍었는데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 조금 민망하다. 하하하
그렇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승선 생활 사진이다.
그렇게 살아 돌아온 우리 아니 선장님께 남은 건 해난보고서였다.
왜 그렇게 항해를 했는지, 왜 일정이 늦어졌는지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고, 각종 선내 장비들이 망가져 수리 및 교체가 필요한 이유를 보고서로 작성해야 했다.
하멜표류기도 보험을 타기 위해서 그렇게 꼼꼼히 기록한 거라더니 선장님도 직장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