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삶을 사랑하는 연습

by 그레텔 그림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나의 첫 직업은 화가였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한때 나는 그 행운이 곧 행복이라고 믿었다. 용기가 부족해 서른 즈음에야 비로소 하고 싶었던 일을 직업으로 받아들였고, 그때부터는 그것이 삶의 전부인 듯 지냈다. 더 잘하고 싶다는 강박을 순수한 열정으로 착각했고, 독립적인 삶을 이루는 데 필요한 다른 부분들은 당당하게 외면했다. 만약 그 시절에 저 질문을 만났다면 나는 아마 망설임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고. 더 나은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미워하면서도 말이다. 사십 대의 문턱을 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수년 동안 애써 그린 그림들을 갤러리의 하얀 벽에 전시해 두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 안에서 뜻밖의 속삭임을 들었다.


"여기까지야."



좋아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은 연기처럼 사그라들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조차 희미해졌다. 한때 그토록 소중했던 것들이 거의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실연만큼 깊은 실망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목소리에게 여러 번 다시 물었다.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런 실패가 나에게 닥쳐온 것인지. 실패를 설명할 만한 이유들을 수집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 생뚱맞은 질문이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질문을 던진 책은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였다.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오래도록 내가 나 자신의 문제에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어쩌면 저 질문과 단도한 대답 속에 묻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대상을 향해 저절로 발생하는 감정일 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려는 의지이자 애써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런 사랑이라면 지금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삶을 사랑하는 일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 시도의 진정성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오랜 궁리 끝에 나는 하나의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특별한 성취를 추구하는 대신, 내 일상의 사소함을 그대로 표현하는 작은 그림을 그려 보기로 한 것이다. 무엇을 그릴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나는 다시 초보가 되었다.



그즈음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집 밖으로 나갔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이 꿈의 경계에 끈적거리며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 봄의 연둣빛이 황량한 주변을 조금씩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 속을 걷거나 달렸다. 산책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호수 공원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감행했다. 계절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원의 초록 풍경 속에는 언제나 새들이 있었다. 경쾌하게 지저귀며 바지런히 움직이는 작은 야생동물들의 생기는 신선했다. 새들을 만나면 이미 고갈된 줄 알았던 다정함이 뱃속부터 올라와 내 스산한 가슴을 덥혀 주곤 했다.


그때 오래 잊고 있었던 감각 하나가 떠올랐다.

내 검지손가락을 야무지게 움켜쥐었던 새의 따뜻한 두 발.

나를 꼭 붙잡았던 작은 생명체의 단단한 존재감.

나는 새를 그리기로 했다.



<내 손가락 위의 새>는 새를 매개로 일상에 깃드는 감정과 생각들을 기록한 그림 에세이 모음이다. 일 년 사계절, 52주 동안 매주 한 편의 그림과 글을 창작하는 프로젝트다. 시행착오 속에서 죄충우돌하며 지속 가능한 형식과 분량을 조금씩 다듬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무심한 도시인의 몸에 계절 감각이 조금 자라났다. 별것 아닌 기쁨과 슬픔을 기록하는 일에서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했다. 새들을 향해 흘러갔던 다정함은 때때로 나 자신에게로 잔잔히 돌아오기도 했다.



한편 나는 계속 서툴렀다. 일상의 피로에 휩쓸려 집중을 놓쳤고, 습관적인 불안이 올라오면 시간과 노력의 가성비를 따지기도 했다. 그림감이나 글감을 제때 찾지 못할 때는 모든 시도가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프로젝트의 중간을 지나는 지점에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이 일 년 간 작업의 의미는 약속된 시간을 모두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보인다는 것.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할 일은 명료하다. 스스로에게 정해준 분량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실행이 내가 배우고 연습하기 원했던, 내 삶을 사랑하는 일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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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가락 위의 새

#토요 그림 에세이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