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가락 위의 새

블루 코뉴어 앵무

by 그레텔 그림



내 손가락 위에 앉은 새의 감각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에 제 온몸을 맡긴 작은 생명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손끝을 야무지게 조이는 그 애정 어린 의존이 가슴 미어지게 고마웠다. 조그만 발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맞닿은 내 피부의 온도를 흡수하듯 금세 뜨거워지곤 했다. 그렇게 말로는 서로에게 도달할 수 없는 존재들이 함께 살아 있음을 공감했다.



파랑이는 짙은 투르쿠아즈, 혹은 터키 블루빛 깃털을 가진 코뉴어 앵무새였다. 십 년 전, 동생과 나는 적적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빠를 위해 그 애를 데려왔다. 그 선택이 얼마나 복합적인 감정을 동반하는 결정이 될 것인지 미처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새들보다 한두 달쯤 나이가 많았던 파랑이는 그만큼 몸집도 컸는데, 그건 입양에 불리한 조건이라고 했다. 의기소침한 모습이 마음에 걸려 데려왔던 그 애는 며칠 지나지 않아 온 집안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호기심 대장이었음이 밝혀졌다. 당시 일산에서 용인까지 버스로 꼬박 왕복 네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주말마다 부모님 댁 가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파랑아아아!" 현관부터 달려가 보송보송한 가슴 앞에 검지손가락을 내밀면 그 애는 기다렸다는 듯 반짝 발을 들어 타박타박 올라섰다.



그 애는 실컷 놀고 나면 내 손바닥 위에 벌렁 누워서 잠들었다. 그 애는 부러진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에 깔때기를 두른 채 카메라 앞에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포토제닉 해지곤 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내 어깨로 기어올라와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조심스럽게 다듬어주기도 했다. 어린 새의 정수리에서는 아기 향내가 난다고 말하는 나를 비웃던 친구의 표정을 기억한다. 어느 날 파랑이는 몸이 좋지 않아 바닥에 누워 있던 엄마의 뺨에 몸을 기댄 채 위로하듯 한참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도 했다. 우리는 그 애를 정말 사랑했다. 하지만 인간 중심의 환경에서 작은 새를 위한 배려는 자주 미끄러졌고, 다름은 애정이 향하고자 하는 방향을 틀어놓기 일쑤였다.



태어나 처음 느꼈던 늦가을의 찬 공기에 놀랐던 걸까. 11월의 어느 날, 아빠는 묵직한 이불 아래로 파고드는 파랑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이 깜빡 졸았던 몇 분의 시간을 작은 몸은 견뎌내지 못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단지 모습을 바꾸어 거대한 자연 안으로 흡수되는 일이란다, 파랑이는 곁에 묻어준 나무의 일부가 되어 지금도 살아 있단다.' 많은 날 동안 나는 슬픔에 빠진 아이를 달래듯 나를 달래야 했지만, 상실은 오직 세월만이 녹여낼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염이 강해서 주변의 모든 새들에게 묻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먹이를 찾아 헤매는 깡마른 비둘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가로수에 앉아 징징대는 직박구리의 사연이 궁금해 걸음을 멈추곤 했다. 겨울 중 가장 추운 날들이 오면 해바라기씨 한 움큼씩을 공원 여기저기에 뿌려놓기도 했다.



일 년도 채우지 못한 파랑이의 삶을 나는 십 년째 애도하고 있다. 파랑이와 나누었던 사랑이 지금 나를 쓰고 그리게 한다. 내가 새들을 그리는 동안, 그 애는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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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그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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