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강원도 출신이라면 좋아하는 음식으로 첫손에 꼽는 것이 강원도 찰옥수수다. 몇 년 새 초당옥수수가 옥수수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했지만 ‘강원도 찰옥수수파’들의 찰옥수수에 대한 사랑은 끄떡없다. 한여름, 뜨겁던 해가 넘어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툇마루에 앉아 쫀득쫀득한 찰옥수수를 뜯어 먹으면 “여름이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좋아하는 채소와 과일을 실컷 심을 수 있다는 것이 농부의 특권이다. 올여름 강원도 찰옥수수를 원 없이 먹을 요량으로 찰옥수수를 대량 심으려던 나의 계획은 시작도 전에 좌절됐다. 강원도의 대표적인 강원도 찰옥수수를 슬프게도 우리 마을에서는 한 포기도 심을 수가 없었다. 강원도가 글로벌 메가시티가 되면서 찰옥수수 금지령이 내려진…것이 아니라 우리 마을이 농촌진흥청이 실시하는 사료용 옥수수 종자 생산 마을, 즉 채종포 마을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이 지정한 사료용 옥수수 종자를 심어 규격에 맞는 종자를 생산하면 농촌진흥청이 전량 수매해가는 식이다. 만약 정해진 방식대로 생산하지 않으면 종자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수매에서 제외된다.
그런 이유로 마을 전체에 농촌진흥청 종자 외 다른 옥수수를 심으면 안 된다는 법이 생겼다. 뒤란에 몰래 심으면 괜찮지 않나 싶지만, 들키는 날에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렇게 엄격하게 규제하는 이유는, 옥수수가 교잡이 잘 일어나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옥수수는 한 대에서 암수가 나오는데 대 끝에서 나오는, 통상 개꼬리라고 불리는 놈이 수꽃이다. 삐죽삐죽 머리카락 같은 꽃에 수분이 매달려있다. 암꽃은 옥수수에 달린 옥수수수염이다. 개꼬리에서 수분이 떨어져 암꽃인 옥수수수염에 떨어지면 수정이 이뤄져 옥수수알이 찬다. 옥수수수염 하나가 옥수수 한 알이 된다니 신기하다.
이때 종자가 다른 옥수수가 인근에 가까이 있으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찰옥수수 옆에 초당옥수수가 있으면 찰옥수수도 아니고 초당옥수수도 아닌 요상한 옥수수가 탄생한다. 우리 마을이 종자용으로 심는 옥수수는 사료용 옥수수기 때문에 강원도 찰옥수수는 금지 품목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올 여름 찰옥수수 먹으러 놀러오세요”라고 남발했던 공수표를 회수해야 한다.
옥수수에서 개꼬리가 나오는 6~7월이면 마을 어르신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채종포용 옥수수는 개꼬리를 일일이 손으로 따줘야 한다. 개꼬리를 따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정이 끝난 후 교잡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재빨리 개꼬리를 제거해야 품종을 지킬 수 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알록달록 보석 옥수수가 떠올랐다. 미국의 비영리 종자단체 네이티브 시즈가 온라인에서 파는 ‘글래스 젬 콘’(Glass gem corn)이라는 이름의 옥수수로 빨강, 파랑, 보라, 분홍, 노랑, 하늘색 등 다양한 컬러로 이뤄져 있다.
보석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운 이 옥수수는 미국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칼 반즈(Carl Barnes, 1928~2016)라는 농부가 심어 2012년 페이스북과 레딧에 사진을 공개했다. 글래스 젬 콘이 공개된 후 네티즌들은 사진 조작이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실제 먹을 수 있는 옥수수로 드러났다. 약 3가지 정도의 품종을 교배해 만들어낸 종자로 인디언 부족에서 씨앗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가 찰옥수수를 마을에서 멀고도 먼, 강 건너 산비탈 밭에 심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강 건너 밭은 사람 발길이 드물어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다. 아버지가 심어놓은 옥수수는 대개 멧돼지가 먹어 치웠다.
“아버지, 멧돼지가 다 먹는 걸 뭐 하러 심어요. 힘들기만 하지, 남는 것도 없는데.”
“멧돼지도 먹고 남으면 나도 먹지.”
지금쯤 강 건너에 사는 멧돼지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것만 같다.
왜 올해는 이 밭에 먹을 게 없지. 늘 먹을 걸 심어주던 할아버지는 왜 안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