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벌써 2년차
여성이라면 생의 주기 중 한 번쯤은 핑크에 빠지는 시기가 있다. 높은 확률로 유아기에 때 핑크 시기를 맞는다. 핑크 원피스에 핑크 머리띠, 핑크 가방, 핑크 신발까지 핑크로 깔맞춤 한 공주님들이 등원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성의 핑크 시기를 작업으로 담아내는 우리나라 사진작가가 있다. 사진작가 윤정미는 ‘핑크 앤 블루 프로젝트'를 통해 색과 젠더의 관계를 조망하는 작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남성은 블루, 여성은 핑크라는 사회적 관념의 기원에 대한 질문과 사회,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들은 무척 흥미롭다.
윤정미 작가의 작품에서도 핑크색 물건을 다량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유치원생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생이 되면 핑크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다가 중.고등학생이 되면 핑크라면 질색을 하는 것으로 핑크 시기를 졸업하게 된다.
‘지랄총량의 법칙’(인간에게는 평생 해야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있다는 이론)처럼 ‘핑크총량의 법칙’이 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생애 한번쯤은 반드시 핑크에 홀릭하게 된다는 법칙이다. 사례 연구는 하나도 한 적 없는, 순전히 나의 뇌에서 나온 생각이다.
나는 생의 주기에서 핑크 시기를 거치지 못했다. 하루에 버스가 2대 들어오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까닭에 핑크색은 구경도 못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중.고등학생 때는 무난한 무채색 옷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는 무채색 옷도 모자라 늘 큰 옷을 사주셨다. 한번 사면 오래 입으라고.
그래서일까, 중년인 지금도 나는 여전히 핑크 시기에 머물고 있다. 핑크 티셔츠, 핑크 머플러, 핑크 모자, 핑크 만년필, 핑크 여권지갑…. 어떤 물건을 살 때 유난히 핑크색에 손이 간다. 이성적으로는 “좀 어른스러운 색을 골라야지”하다가도 기어이 핑크를 데리고 온다. 나는 지금 내 생의 핑크 총량을 채우는 중이다.
색채심리학에서 핑크는 여성, 순수, 행복, 젊음, 로맨틱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핑크색 물건이 있으니 바로 고무장갑이다. 세상의 모든 핑크색을 사랑하지만 핑크 고무장갑만은 사랑하기가 어렵다.
처음 핑크색 고무장갑을 제조한 사장님은 아마도, 여성이 주로 설거지를 하니까 여성의 색인 핑크를 쓰자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장님이 간과한 것이 있다. 핑크가 여성의 색이라고는 하지만 노동과 결합할 수는 없는 색이다. 핑크와 노동은 결코 맞닿을 수 없는 세계다. 최근에는 베이지, 그레이, 그린, 옐로 등 다양한 색의 고무장갑이 나와서 맘 편히 고를 수 있어 다행이다.
사실 핑크색 얘기를 장황하게 한 건 핑크 손톱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가끔 매니큐어를 칠하는 데 색깔은 어김없이 핑크다. 농사를 시작하고 나서 핑크 매니큐어를 바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잦아졌다.
“아니, 농사짓는 사람이 손톱을 칠하다니! 순 엉터리구만.”
내 손톱을 보고는 엉터리 농사꾼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매니큐어를 칠하고는 호미며 괭이질을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매니큐어가 금방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헐적 농사꾼이 매니큐어를 손톱에 바를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밭에서 조금만 일을 해도 손톱밑에 새까맣게 때가 낀다. 한번 흙 때가 끼면 웬만해서는 잘 빠지지도 않는다. 목욕탕에서 몇 시간 푹 들어가 있지 않는 이상 샤워만으로 때를 빼기는 어렵다.
시골에서야 손톱밑에 때가 있든 말든, 옷에 흙이 묻었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 나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 5일을 보낼 때가 문제다. 모임 때문에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데 손톱밑에 때가 끼어있으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형편없이 지저분한 사람으로 보일게 분명하다.
이럴 때 긴급처방약이 핑크 매니큐어다. 핑크 매니큐어를 잘 바르고 나면 시골에서 농사 짓던 손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감쪽같다. 때를 가려줄 뿐 아니라 행복, 젊음, 로맨틱한 기운도 담뿍 불어넣어 준다. 핑크의 힘이다. 농사를 하면서 핑크총량도 채우고 꿩 먹고 알 먹고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