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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알 Mar 09. 2024

“저는 인턴이고, 테이프를 잘 뜯습니다.”

전공의 이야기 (2) 인턴 의사의 고민

처음부터 정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수술방의 한기는 해롭거나, 적어도 괴롭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학생 때는 환자와 소통 잘하기로 이름난 내과 교수님의 진료 장면을 마음에 담아두고 동경했었다. 정형외과 수술팀의 거친 말투와 위압적인 분위기를 보며 저 과만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구나 다짐했던 적도 있다. '학생 의사'는 면허를 받아 인턴 의사가 되었다. 첫 근무지는 응급의학과였다. 역동적인 분위기에 취해 응급실을 사랑하 되었다. 24시간 근무해도 피곤한지 몰랐다. 24시간 연달아 쉴 수 있으니 오히려 좋다는 말을 주변에 하고 다녔다. 이게 내 적성이라고 느꼈다. 스승의 날, 신출내기의 설렘과 고민을 담아 모교의 지도교수님께 편지를 썼다.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오리알입니다.


인턴 생활도 벌써 만 3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제가 더 이상 학생이 아니고, 저에게도 환자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그 무게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3월 응급실에서 초진과 술기를 하고, 4월 마취과에서 환자 관리를 하다 지금 5월은 소아과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NICU 인턴은 매일매일 신생아들의 채혈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란셋을 이용해 신생아의 뒤꿈치 모세혈관 피를 받는데, 몇 시간이고 구부정히 서서 방울방울 피를 받아내다 보니 전에 없던 인내가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것 같습니다.


진로고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3월 응급실에서 근무하면서 응급의학과에서 근무하고픈 소망이 생겼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 그렸던 아주 단순한 '의사'의 모습이 거기 있었습니다. 계통에 상관없이, 중증도에 상관없이, 내원하는 환자를 무조건 받아서 지금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 그런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 그리고 응급실을 떠난 후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에 인계하는 것. 정말 매력적인 자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주변에 말했을 때 만류하는 분들이 많아 아직은 조심스럽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은 잦아들듯 잦아들지 않아 안타깝네요. 저는 9월에 휴가가 지정되어 있는데 그때는 꼭 찾아뵈어도 괜찮을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수님 안녕히 계세요.

오리알 올림.



이런 내가 정형외과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응급의학과 근무턴을 구하려다가 힘들기로 소문난 정형외과 인턴 자리를 끼워 팔기 당했기 때문이었다. 인턴들끼리는 상호 동의 하에 수련규정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근무과를 교환할 수 있었다. 얼떨결에 마음속 기피 1순위였던 정형외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인턴샘, 구경하고 있지 마세요, 인계 안 받았어요?” 수술장에서 첫 번째로 들었던 말이다. 인계받아야 했던 내용들이란 이러했다. 수술할 다리를 전공의가 소독하는 동안 안 흔들리게 잘 잡고 있는 방법. 시커먼 소독액이 바닥에 묻지 않도록 린넨을 알맞게 깔아놓기. 그날 수술장에서 쓸 플라스터(붕대에 붙이는 면테이프, 매우 여러 가지 용도로 쓴다)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미리 벽에 붙여놓기…


첫날 혼쭐이 나서 일까, 정형외과에 적응하기 위해 정말 열과 성을 다했다. 선배 전공의들은 하나둘씩 그들이 알고 있는 ‘비법’들을 ‘전수’해줬다. 이를테면 플라스터를 사람키만큼 길게 자르는 방법(의자를 눕히고 의자 다리에 테이프를 걸어놓고 죽 당긴다.) 같은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배우는 내용은 흐르는 피를 순식간에 닦는 방법, 가위로 미끄러지지 않고 봉합사를 자르는 방법처럼 수술 필드에서의 요령이 되었다. 마지막 주 피하 조직을 흡수성 봉합사로 모으는(approximation) 방법, 쉽게 말해 ‘꼬메는 법’이 되었다. 드디어 한 두 땀 느린 손으로라도 의사가 할 법한 일을 하게 된 셈이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성취, 나도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효능감, 그리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것부터 하나하나 알려주는 선배들의 분위기. 이 체험들이 정형외과에 대한 내 인상을 바꾸어놓았다.


“그래서 오 선생은 이제 정형외과 할 마음이 좀 생겼나?”

근무 마지막 날 쫑파티, 옆에 앉은 종양 파트의 교수님이 불어보았다. 한 달간 종양팀 수술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터였다. 이 대답 여하에 따라 내 미래의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배우고 싶다는 마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 선발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때로는 계산을 포기하고 진실을 말하는 게 가장 쉬운 선택일 때가 있는 법이다. 어쨌거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건 사실이었으니까.

“네 교수님.”

마주 앉은 선배와 옆에 있던 교수님이 깔깔깔 웃으며 손뼉 쳤다. 분위기는 무르익고 화기애애했다. 못 마시는 술을 진탕 마셨다.




병원, 아플 때나 마지못해 가는 괴로움의 공간. 여기 그곳에 사는 사람이 있다. 병원이 일상인 사람에게 그 곳은 어떻게 느껴질까? 무얼 먹고 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작가는 대학병원 정형외과 전공의, 환자에게 민폐끼치지 않으려, 선배들과 교수님께 혼나지 않으려 발버둥 치다보니 어느덧 치프(최고 연차 전공의)가 되었다. 쉬고 싶다는 마음을 하늘에 들켜버린걸까.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정말로 긴 시간 병가 중이다.


'전공의'라는 존재에 흥미가 생긴 분들이라면, 여기 한 신출내기 의사의 이야기가 솔깃할지도 모르겠다.


(0) ABR. 뭇 전공의들의 꿈을 제가 이루게 되었습니다. / 서문


(1) 의사 일을 한다고 환자 노릇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 MRI 통 안에서


(2) "저는 인턴이고, 테이프를 잘 뜯습니다." / 인턴 의사의 고민


(3) 시커먼 발 어른거리는 밤 / 경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4) 전공의는 왜 집에 못 갈까? / 일상이 된 초과 노동


(5) 대형 병원에 펼쳐진 중력장 / "사람을 더 뽑자"는 말에 대하여


(6) 운수 좋은 날 / 모탈리티 케이스


(7) 진실된 마음이 항상 최선의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 AMA discharge


(8) "잘못되면 의료진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 법의 사각지대, 무연고 시설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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