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알 Mar 11. 2024

시커먼 발 어른거리는 밤

전공의 이야기 (3) 경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수술방에서 한두 땀 씩 봉합에 참여하게 되고, 필드에서 할 줄 아는 게 많아지면서 수술에 대한 애정이 커져갔다. 시키는 걸 열심히 했다.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서 했다. 선배들의 호의도 느껴졌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정형외과 의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퍼레이터의 진두지휘 하에 피가 많이 나는 큰 수술을 하다 보면 몇 시간이고 금방 지나갔다. 여러 위치에서 절골을 하고 금속으로 된 외고정 장치를 달며 수술의 우아함을 설파하는 교수님은 신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긴 학생 시절 동안 게임 중독 상태와 벼락치기 모드를 오고 갔던 나는 이런 몰입 상태에서 구원의 희망을 느꼈다.


당직 근무 중에 한 번은 병실에 드레싱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병실에 진동했다. “안녕하세요, 드레싱 좀 하겠습니다.” 내색하지 않고 환부를 살펴봤다. 연부조직 종양이 피부까지 전이가 되어 오른쪽 가슴, 겨드랑이, 위팔 전반의 피부가 괴사된 환자였다. 손상된 피부 장벽에 생긴 감염과 진물 때문에 나는 냄새였던 것이다.


생리 식염수를 따서 튀지 않게 적당한 세기로 흘려 진물을 씻어냈다. 멸균 장갑 위에 연고를 덜어 부드럽게 도포했다. 눈으로 환부의 크기를 가늠하고 커다란 드레싱 폼을 잘라서 덧대고, 드레싱이 떨어지지 않도록 붕대로 감아 고정했다. “선생님은 손이 좋네요. 고맙습니다. 무슨 과 인턴이세요?”


스스로를 성격 급하고 덜렁대는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는데, 어떤 과제 앞에 서면 내가 꼼꼼하고 손재주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일도 재미있는데 잘할 가능성이 보인다니, 이보다 좋은 조건을 생각하기 어에 려웠다. 다만 끝까지 고민이 되었다. 하나를 배우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일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인턴 시절을 뒤집어 말하면, 겨우 봉합법 하나 배우는 데 한달이 걸린 것이기도 했으니까.


해당과에 지원할 예정인 인턴을 ‘프로퍼(proper)’라고 부른다. 인턴들은 매달 근무과를 순환하며 평가를 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실히 근무할 유인이 있다. 그중에서도 프로퍼는 근무 당시의 태도, 평판, 근무 성과가 직접적으로 선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아주 경쟁적인 방식으로 성실함을 어필할 수밖에 없다.


계약서에 기재된 근무 시간에 따르면 오후 6시엔 업무를 마치고 퇴근을 해야 하지만, 이 규정을 지키고 일한 날은 단언컨대 단 하루도 없었다. 밤이 되면 다음날의 수술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각 수술방에 장비들을 미리 세팅했다. 수술팀이 수술방에 나와서 장비를 찾아 준비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아침 수술부터 밤 수술까지 필요한 장비와 소모품을 방마다 ‘완벽하게’ 갖춰놓아야 했다. 수술방 벽에는 다음날, 다다음날까지 쓸 수 있는 테이프가 길이별로 오와 열을 맞춰 도배되다시피 붙어있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는 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감독하는 교수님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정규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주 늦은 시간에 몰래 작업을 했다.


누구도 이런 형태의 초과 업무를 강제하지 않았지만, 선발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우리는 이와 더 잘 착취당할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일을 끝낸 새벽, 당직실에서 누워 눈을 감으면 베타딘 칠한 시커먼 발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이것이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에 불과했다는 것. 전공의 생활이라고 이보다 절대로 낫지 않다는 것을, 입국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병원, 아플 때나 마지못해 가는 괴로움의 공간. 여기 그곳에 사는 사람이 있다. 병원이 일상인 사람에게 그 곳은 어떻게 느껴질까? 무얼 먹고 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작가는 대학병원 정형외과 전공의, 환자에게 민폐끼치지 않으려, 선배들과 교수님께 혼나지 않으려 발버둥 치다보니 어느덧 치프(최고 연차 전공의)가 되었다. 쉬고 싶다는 마음을 하늘에 들켜버린걸까.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정말로 긴 시간 병가 중이다.


'전공의'라는 존재에 흥미가 생긴 분들이라면, 여기 한 신출내기 의사의 이야기가 솔깃할지도 모르겠다.


(0) ABR. 뭇 전공의들의 꿈을 제가 이루게 되었습니다. / 서문


(1) 의사 일을 한다고 환자 노릇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 MRI 통 안에서


(2) "저는 인턴이고, 테이프를 잘 뜯습니다." / 인턴 의사의 고민


(3) 시커먼 발 어른거리는 밤 / 경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4) 전공의는 왜 집에 못 갈까? / 일상이 된 초과 노동


(5) 대형 병원에 펼쳐진 중력장 / "사람을 더 뽑자"는 말에 대하여


(6) 운수 좋은 날 / 모탈리티 케이스


(7) 진실된 마음이 항상 최선의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 AMA discharge


(8) "잘못되면 의료진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 법의 사각지대, 무연고 시설 환자



작가의 이전글 “저는 인턴이고, 테이프를 잘 뜯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