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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알 Mar 21. 2024

"잘못되면 의료진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전공의 이야기 (8) 법의 사각지대, 무연고 시설 환자

저녁 때가 되도록 환자가 입원을 안 했다. 내일이 수술인데. 몇 달 전에 쇄골이 부러져서 끝단을 갈고리 금속판(hook plate)과 나사못으로 고정했던 환자였다. 갈고리 금속판은 6개월이 지나면 뽑는 수술을 해줘야 한다. 안 그러면 금속판이 견봉뼈 밑단을 파고든다. 관절염이 생기고, 심하면 내고정 장치가 탈락해서 재고정 수술이 필요하게 된다. 전화번호를 찾아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어깨관절팀 주치의입니다. 강성진 님 보호자 분이시죠?”

“네 안녕하세요. 보호 시설 담당 간호사입니다. 시설이 병원이랑 멀어서요. 곧 도착할 겁니다.”


강성진 님은 무연고 중증 장애인 시설에서 보호 중인 환자였다. 지적 장애를 갖고 있으며, 뇌전증(간질) 과거력이 있어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항경련제와 진정제 계통의 향정신성의약품을 복용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 도착했다는 병동의 전화를 받고 병실로 갔다.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는데, 대화가 전혀 불가능한 정도였다. 수술 설명을 위해 보호자를 찾았는데 병원에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 계시지요? 환자분이 의사결정 능력이 없어서 수술 설명을 들으시고 동의서를 작성해주셔야 하는데요.”

“의료인 두 명이 서명하고 진행하시면 되지 않나요? 시설 환자들이라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는데요.”


몇 년 전에 공부했던 의료 법규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그건 응급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응급 수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환자 분을 만나보니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정도라서 법정대리인이 오셔야 하겠습니다.”

“성진 씨는 가족도 없어서 어차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시설 직원 밖에 없는데요. 그냥 선생님이 서명하고 진행하면 안 될까요?”


병원 법무팀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보호 시설 환자인데 친지도 없다고 합니다.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동의서를 작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이런 경우 법으로 지정된 후견인이 서명을 하면 됩니다.”

“시설 쪽에서는 후견인 임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던데요. 시설에서 같이 생활하는 보호자들이 수술 설명을 듣고 동의서에 서명하는 방법은 불가능할까요?”

“그렇게 진행하면 동의서에 법적인 효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의료 사고가 발생하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선생님이 책임지는 생활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끙… 심지어 기저력으로 뇌전증이 있는 환자였다. 수술 전후의 급격한 신체적 스트레스와 마취를 위한 약물 투약은 간질 발작의 위험성을 높인다. 교과서적으로만 그런게 아니라 수술하고 나서 발작이 생기는 환자를 왕왕 보게 된다. 잘 쓸 줄도 모르는 향정신성약품을 쓰고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과정은 매번 적응 안 되는 스트레스였다. 응급 수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미룰 수 있는 수술도 아니었다. 여기가 사각지대구나. 궁여지책으로 의료진 2인, 시설을 대표해서 위임장과 재직 증명서를 받아 온 보호자가 모두 서명했다. 책임 소재에 대한 각서 비스무리한 걸 작성했다. 차트에는 응급 수술이 아니지만 수술이 긴요하게 필요한 이유와 이와 같은 동의서를 받게 된 경위를 길게 썼다.


늘상 있는 어렵지 않은 수술이었지만 괜히 조마조마했다. 수술 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해질 균형이 깨지고 암모니아 수치가 올라갔다. 괜히 수술 전보다 잠도 많고 가라앉아 보였다. 이런저런 약을 추가하고 하루에 몇 번씩 암모니아 농도를 떨어뜨리기 위한 락툴로스(lactulose) 관장을 했다. 매일매일 신경과에 컨설트를 써 괴롭혔다. 하루 이틀이면 퇴원하는 수술이었는데 집에 가기까지 열흘이 걸렸다.



일주일이 더 지나 외래에서 환자를 봤다. 잘 아문 수술 상처를 보고 실밥을 풀었다. 통증 때문인지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펴져있었다. 시설에 돌아가서도 활달하게 잘 지냈다고 했다. “이제 별 문제없으시면 다시 안 오셔도 되겠습니다.” 말을 하며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차트를 열어 기록했다.


‘open f/u’


*치료가 종결되었으니 추후 예약된 일정이 없다는 뜻.




병원, 아플 때나 마지못해 가는 괴로움의 공간. 여기 그곳에 사는 사람있다. 병원이 일상인 사람에게 곳은 어떻게 느껴질까? 무얼 먹고 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작가는 대학병원 정형외과 전공의, 환자에게 민폐끼치지 않으려, 선배들과 교수님께 혼나지 않으려 발버둥 치다보니 어느덧 치프(최고 연차 전공의)가 되었다. 쉬고 싶다는 마음을 하늘에 들켜버린걸까.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정말로 긴 시간 병가 중이다.


'전공의'라는 존재에 흥미가 생긴 분들이라면, 여기 한 신출내기 의사의 이야기가 솔깃할지도 모르겠다.


(0) ABR. 뭇 전공의들의 꿈을 제가 이루게 되었습니다. / 서문


(1) 의사 일을 한다고 환자 노릇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 MRI 통 안에서


(2) "저는 인턴이고, 테이프를 잘 뜯습니다." / 인턴 의사의 고민


(3) 시커먼 발 어른거리는 밤 / 경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4) 전공의는 왜 집에 못 갈까? / 일상이 된 초과 노동


(5) 대형 병원에 펼쳐진 중력장 / "사람을 더 뽑자"는 말에 대하여


(6) 운수 좋은 날 / 모탈리티 케이스


(7) 진실된 마음이 항상 최선의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 AMA discharge


(8) "잘못되면 의료진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 법의 사각지대, 무연고 시설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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