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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알 Mar 07. 2024

ABR. 뭇 전공의들의 꿈을 제가 이루게 되었습니다.

<전공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ABR(절대 침상 안정, absolute bed rest)


여느 날처럼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 중이습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 핸드폰에서 눈을 뗐습니다. 기사님의 탄식, 앞유리로 보이는 승용차의 비상등이 '사고가 난 건가?' 하는 물음을 떠올리게 할 때쯤, '쾅' 소리와 함께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센 충격이 들이닥쳤습니다. 몸이 뒷좌석 여기저기 부딪치며 뒹굴었습니다.


부딪친 복부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쥐어짰습니다. 입에서는 피맛이 났습니다. 몸을 웅크리고 고통을 수습하는 동안, 어딘가 전화 거는 기사님의 떨리는 목소리, 창밖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 차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멈추는 소리가 지나갔습니다.


팔다리가 움직여지는지 확인했습니다. 얼굴을 만져보았습니다. 안경을 고쳐 쓰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갓길 뒤편에는 흉하게 찌그러진 승합차의 앞부분이 보였습니다. 타고 있던 택시의 뒷부분도 처참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종의 이중추돌 사고였던 것 같습니다. 첫 추돌 후 우회전하며 급히 속도를 줄인 제 택시를, 빠르게 달려오던 뒤차가 들이받은 겁니다. 차들의 몰골을 보니 이게 교통사고라는 것이 실감 났습니다.


사고를 수습할 사람들이 도착하는 데 한참이 걸렸습니다. 정규 수술이 있는 날이었는데, 부득이 지각하게 되었다고 팀에 양해를 구했습니다. 보험사 직원, 경찰관, 택시 기사님에게 제 이름과 연락처 같은 걸 남기고 새 택시를 잡아 다시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환자로 왔네요.” 응급실 외상 구역으로 가서 사고 경위와 아픈 부위를 말씀드렸습니다.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파여 있는 이빨 자국을 사진으로 찍는데, 아무리 의무기록이라지만 아는 사람들 앞에서 그러고 있으려니 참으로 민망했습니다. X-ray를 찍고, 피검사도 하고 복부 CT 검사도 했습니다.


외상구역을 담당하고 있던 응급의학과 전공의 선생님과 같이 검사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괜찮아 보였습니다. 어디 부러진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크게 아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진료비를 정산하고 일하러 갈 채비를 했습니다. 수술이 6건 있는 날이라 마음이 급했습니다. 수술장으로 가던 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비뇨의학과 전공의입니다. 응급실에서 찍은 CT에서 우측 신장 열상이 보여서 전화드렸습니다. 바로 입원이 가능하실까요? 당장 수술할 정도는 아니지만 출혈과 소변 누출 위험이 있어서요. 입원해서 ABR*하고 모니터링이 필요합니다.”

*ABR(절대 침상 안정, absolute bed rest)


까슬한 환자복을 입고, 왼쪽 손목에 환자 팔찌를 찼습니다. 병실은 5인실이었는데, 누가 배려를 해주셨는지 창가 옆자리였습니다. 짐을 대충 풀고 가만히 누워있으니 이 와중에도 슬슬 잠이 오면서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만 발 뻗고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공의 수련을 받는 지난 4년 내내 했었는데(혼자만의 바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게 이런 식으로도 이루어질 수가 있구나.


누워있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역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있고, 밤에는 잠이 안 와 답답하고, 허리는 아프고, 입은 텁텁하고, 무엇보다도 지루했습니다. 빈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핸드폰으로 메모장을 열어 이런저런 생각들을 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은 병원에서 보낸 지난 4년의 시간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전국에서 전공의 파업이 시작된 것이 그쯤이었습니다. 연일  “전공의 파업”이 뉴스를 오르내렸습니다. 행정 관료들, 심지어 대통령까지 방송에 나와 파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공중파, 라디오, 유튜브에 판이 깔리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왜 전공의들은 누구보다 먼저 파업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누구길래 수술이 연기되고, 외래가 줄어들며, 대학병원이 멈추게 된 걸까요?


이 책은 의료 정책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나, 행정 권력에 항거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글이 아닙니다. “전공의”라는 존재에 관심이 생긴 분들, 전공의가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한 분들을 위해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그저 환자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선배들과 교수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어느덧 치프(최고 연차 연공의)가 된 한 전공의가 사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아래는 잠정적인 목차입니다. 글 전체에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병원에 사람이 살고 있어요> 정도가 될까요? 부디 병가 기간 내에 다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차:

(0) ABR. 뭇 전공의들의 꿈을 제가 이루게 되었습니다. / 서문

(1) 의사 일을 한다고 환자 노릇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 MRI 통 안에서

(2) "저는 인턴이고, 테이프를 잘 뜯습니다." / 인턴 의사의 고민

(3) 시커먼 발 어른거리는 밤 / 경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4) 전공의는 왜 집에 못 갈까? / 일상이 된 초과 노동

(5) 대형 병원에 펼쳐진 중력장 / "사람을 더 뽑자"는 말에 대하여

(6) 운수 좋은 날 / 모탈리티 케이스

(7) 진실된 마음이 항상 최선의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 AMA discharge

(8) "잘못되면 의료진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 법의 사각지대, 무연고 시설 환자

(9) 발표라는 연극 / 학회 발표 이야기

(10) (제목 미정) / 첫 집도 이야기

(11) 제가 주치의입니다. / CPR

(12) 좋은 의사 되기 vs. 좋은 시민 되기 / 전문성과 교양의 긴장 관계

(13) 형동생인가 선후임인가 / 인간관계에 대하여

(14) 솔직히 공부하는 법을 아직도 모르겠다 / 일, 공부, 연구 사이

(15) 충치라는 불치병 / 나의 치과 치료 이야기

(16) 2020년 파업 비하인드 / 병원에 남아야 했던 한 인턴의 이야기

(17) 수련 시간에 대한 소고 / 전공의 성장의 관점

(18) 최적화라는 직업병 / 루틴 식단 운동

(19) 나는 왜 달리는가 / 달밤에 20킬로를 달린 이야기

(20) 운동은 젊은 날의 유희에 불과할까 / 첫 풀코스 마라톤

(21)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 칭찬 카드와 격려 팡팡

(22) <피프티 피플>을 꿈꾸며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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