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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Jan 12. 2022

두뇌재활

난 여자가 아닌데 2

그 해의 가장 큰 과업을 달성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학업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학구열이 터질 듯이 올라왔다. 여러 루트를 알아보고 시도해봤으나, 오프라인으로 공부를 하기에는 체력도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사이버대학교에 진학해 공부를 하면서 삶을 재활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낼 수 있는 두뇌의 체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두뇌 에너지와 몸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두뇌재활의 일환으로 똑똑한 사람들과의 소통을 하며 통찰력과 사고력을 배우고 익히고 싶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삶을 살아갈 때 항상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노력하여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에 약학 공부를 하는 지인은 내게 필요한 모든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아주 좋은 멘토였다.


약 반 년의 시간동안 약학 지식을 알려주며 약 상담을 해 준 그는 나에게 자진해서 책도 여러 권 추천해주었다. 독서하는 능력도 향상시키고 싶었던 나는 그가 추천해준 책들을 독서재활에서 중요한 책들로 선정했다. 

내게는 그 책들이 의료진이 추천해준 치유의 책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그렇게 점점 그는 약을 상담할 수 있는 의료진에서 다른 분야의 상담도 털어놓을 수 있는 의료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의료진의 사전적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나에게만큼은 의료진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기억이 돌아온 것에 대해서도 털어놓게 되었고, 불가항력에 의해 그 분을 놓친 것에 대한 의문과 답답함도 하소연하게 되었다. 의사선생님들에게 진료를 보러 가서 토로했듯이, 그렇게 그에게 얘기를 하고 대화를 요청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도 신기하고 재밌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는 의사선생님에게 진료를 보듯이 점점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하게 되었고, 아무래도 기억에 관한 증상이 나에게 가장 강렬한 만큼 그 분야의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어떤 시점부터 그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들의 주제는 기억 때문에 놓친 그 분에 대한 하소연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에 지쳤던 걸까? 어느 시점에 즈음 그는, 나와 연락하는 것이 부담된다는 말을 하였다. 내가 이성이기에 선을 지키고 싶다고 하였다. 그 때의 내게 ‘그와 연락하는 것’은 곧, ‘진료를 보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에, 그 말이 진료를 거부당하는 것과 같은 상처로 다가왔다.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러 건강을 많이 회복한 지금은, 그의 반응이 지극히 일반적이고도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그러한 표현들을 들을 때만 해도 난 그가 남성이고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할 만큼 아픈 상태였다. 그저 나는 한 사람이었고, 살고 싶어 치열하고 절실하게 고군분투하는 환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그런 반응들에 또 다시 하늘이 미웠었다.      


사람이 살고 죽는데 있어서 이성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저 건강해지고 싶은 노력을 처절하게 하는 환자일 뿐인데 왜 다들 내가 여자임을 강조하는 것인가! 내게 주어진 고통 자체가 특수한데, 왜 일반적인 기준을 자꾸 고수하는가! 일단 내가 살 길을 찾을 때까지만 봐줄 수는 없는 것인가!  세상을 향해 나 홀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쳐댔다.    

 

「 나 그냥 숨만 쉴 테니까 누가 나 좀 애기 키우듯이 키워줬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결정하기도 선택하기도 에너지가 딸려서 선택의 순간이 오면 멍하다.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고 신경을 써야 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와 버리면 

생체리듬이 바로 무너지고, 열이 나고, 몸이 탈이 난다.      

그걸 알기에 늘 에너지 배분을 신경 쓰고 

양치하고 식사하고 소화시키는 것도 스케줄로 생각해야 하는 나인데, 

예정되지 않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나면 픽 반 실신을 한다. 

치매환자마냥 어린애 같아지고, 

내가 했던 언행도 제대로 기억 못할 때도 있다. 

의료진들과 의사소통하고 치료일지 기록하고 

치료단계 돌아보고 연구하고 그 끈을 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난 대단한 건데.

시체처럼 폐인 되지 않으려고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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