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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Jan 12. 2022

시간의 흐름을 따라잡기

두 번째 수능

‘무의식 속 그의 기억’이 돌아온 그 해 겨울, 나는 재활의 일환으로 수능을 응시했다. 나에게 ‘수능 응시’가 의미하는 것은 3가지였다.      


첫째, 나의 의학적 증상을 확인하는 것. 

로그함수부터 근현대사까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지식들을 테스트할 수 있는 시험을 치르는 행위를 통해서, ‘몸은 현재를 살고 있지만 내 두뇌는 교통사고 언저리부터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해 내고 싶었다.      


둘째, 누워 지내다시피 하던 내가 앉아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 받는 것.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는 과업을 성공하는 자체가 나에게는 큰 성취감을 줄 것이며, 자신감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셋째, 수능이라는 공통분모를 두고 흐른 세월의 흐름을 체감하는 것. 

비록 ‘시간의 비약’ 속에서 나의 두뇌는 과거에 멈추어 있지만, 내가 살아가야 할 현재에서 나의 ‘첫 수능’은 ‘매우 오래 전’이며, ‘두 번째 수능’을 치르는 내 나이가 ‘스물아홉’이라는 것을 나에게 인식시키고 싶었다.     

‘수능 응시’라는 목표를 위해서 나는 약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날 하루의 성공을 위해서 필요한 약들을 다 준비해서 꼭 목표를 이뤄내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서 하루 종일 앉아서 시험을 치러 내는 것은 ‘재활’의 일환이었다. 


그러던 중, 메신저 친구추천에 잊고 지냈던 한 지인의 이름이 떴다. 약학 공부를 하고 있는 지인이었다. 평소 모습을 볼 때 인생을 정말 치열하고 열심히 산다고 느꼈고, 무언가 지친 내 마음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따끔한 조언을 구할 수 있겠다 싶어서 메시지를 보냈다.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가 가볍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기에, 나의 힘든 상황을 사람에게 말로 표현하는 자체가 상대에게 어두움과 아픔을 전달하는 것 같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속으로 삼키고 신에게만 내 속마음을 토로하며 살아오다가, 더는 혼자 버틸 힘이 없고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눈 딱 감고 용기를 내보았다. 


먼저 그에게 나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휴학,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장을 받기 위해 애썼던 교육대학교를 결국 졸업하지 못 했는데, 그것도 한 학기를 남겨두고 4학년 1학기 끝에서 제적이 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오던 힘을 다 잃었노라고,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는 동기는 무엇이냐고 배우고 싶다고 조언을 구했다.


최대한 감정을 빼고 객관적인 사실만 말하며 나의 소식을 전했지만, 실은 속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실감 속에 깊이 빠져있었다. 지나고 보면 받아들여지고 순응될 것들이 그 당시만큼은 쉽지 않다. 지금은 그것까지도 내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제적이 되었기에 건강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제적의 충격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이십대의 대부분을 졸업장 하나만 붙잡고 살았는데 이십대 전부가 날아가 버린 것만 같았고, 앞으로 어떤 것을 붙잡고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랜만의 연락에도 성심성의껏 답해주던 그는 선뜻 먼저 나에게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약학지식에 대해서 도움을 주겠노라고 말을 했다. 나에게는 구세주 같은 말이었다. 만약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의 근본적인 치료법을 찾지 못 한다면 최악에는 병원에서 말한 대로 평생 진통제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체질상 약물 부작용이 심한 나는 내 몸에 맞는 약과 해로운 약을 찾아 기록해 나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씩 메시지를 통해 그에게 약 성분과 작용기전에 대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으며 나만의 약력수첩을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다. 친절하게 상담에 응해주던 그는 내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다른 의학 상식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그래서 뭔가 주치의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의학상식과 지식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그의 도움에 힘입어, 지진으로 일주일 수능일 미뤄졌던 그 해 수능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집 밖으로 외출해 나가서 하루 종일 외부에 있는 것조차 큰 도전이었던 몸 상태였기에, 일주일의 시간이 더 주어진 것은 나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비상약들을 잔뜩 챙긴 채로 수능시험장으로 향하였고, 기억이 돌아오면서 뇌에서 무궁무진하게 떠오른 수능 지식들을 활용해 열심히 문제를 풀어나갔다.      


오랜 시간 공부해서 시험에 응하는 다른 수험생들과 다른 입장이었지만, 하루 종일 ‘머리를 쓰는 행위’가 가능했다는 것과 긴 시간 밖에 있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 한 해 내내 큰 목표로 삼고 차근차근 건강을 끌어올린 나의 단계별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 이 세 가지 의미는 그 해를 뿌듯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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