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님 Aug 08. 2024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죄

책임감인가 사랑인가


나의 아빠는 하루 종일 일을 하며 돈을 꼬박꼬박 벌었지만 우리 집은 늘 마이너스에 빚을 지고 살았다.

경제관념이 없는 엄마는 돈을 모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 같았다. 모아놓은 돈이 없으니 엄마나 할머니가 한번 입원할 적마다 몇백만 원씩 나오는 병원비는 고스란히 빚이 되었다. 빚이 있어도 씀씀이가 좋은 부모님 덕분에 엄청 부족하게 크지는 않았다.


아빠는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면서 아픈 엄마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런 아빠가 나는 항상 너무 안쓰러웠고 대단한 사람 같았다. 나는 아빠를 참 좋아했다. 모르는 게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아빠에게 묻고 아빠에게 연락했다. 엄마가 아무리 아프고 불안정해도 아빠가 있으면 무섭지 않았다.

아빠가 알아서 해결해 주었으니까.


그런 아빠가 있어서 나는 엄마를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야속하게 이제 아빠가 너무 늙었다. 몇 년 전 아빠에게 뇌경색이 한번 온 이후로 아빠는 매우 약해졌다. 강했던 아빠가 약해지니 엄마는 더 세졌다. 어린아이 같은 엄마가 세져서 늙은 아빠를 못살게 군다.

아빠가 너무 안쓰럽다. 그래서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선을 넘어도 불쌍한 아빠를 생각하며 참고 참았다. 내가 참지 않으면 엄마는 기분이 안 좋아질 테고 그러면 아빠는 또 괴로워질 테니까..


그러다가 내가 터져버렸다.


그간 참아온 게 터지면서 아빠마저 원망스러워졌다. 왜 그 책임감 하나로 엄마를 끝까지 책임져서 나에게 이런 짐을 지우게 하는 건지..

보통의 남자 같았으면 진작에 이혼하던가 도망쳤을 텐데...

난 언제까지 자식이라는 이유로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을 역할을 해야 하는 건지...


엄마가 나에게 버린 그 감정이 나에게 남아서 우울증이 나를 잠식했을 때 나는 나를 살려야 했다.

내가 힘이 들어서 내가 죽을 것같이 아파서 이제 못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나 자신밖에 없었다.


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엄마의 연락을 외면하는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엄마를 외면할 없는 유일한 걸림돌은 바로 불쌍한 아빠이다.

어느 날부터 나의 엄마 아빠 둘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엄마를 선택했다. 아빠 본인의 선택이고 책임지는 것도 아빠의 선택이다.


돈도 없으면서 계절마다 엄마에게 고급스러운 옷을 사입히고 본인은 십 년도 넘은 옷을 입고 다닌다. 그런 모습을 보면 엄마는 철없는 아이 같고 아빠는 여전히 불쌍한 사람이다. 아빠는 말로는 "네 엄마 때문에 못살겠다. 또 저런다"라고 하지만 아빠는 그런 엄마를 진심으로 안쓰러워하고 본인이 엄마를 챙기고 돕고 살리는 것에 어쩌면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아빠가 다르게 보이면서 그제야 나는 그동안 아빠의 삶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엄마를 입원시키고도 안쓰러워서 하루가 멀다 하고 면회를 가고 전화를 받아주고 퇴원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에도 금방 엄마를 퇴원시켜 주었구나..

어느 날 입원한 엄마 면회를 간 날에 아빠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이해가 되었다. 그건 사랑이었구나.

아빠는 그런 엄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건 아빠의 인생이다. 엄마 아빠 둘의 살아가는 나름의 사랑 방식이었는데 내가 오해를 했다.


그걸 이제야 깨닫고 나니 나는 아빠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많이 해방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둘의 사이에서 온전히 독립을 하기로 했다. 이제 아빠 때문에 엄마에게 끌려다니지 않으리라. 나는 더 이상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이 아니야... 내 감정은 이제 내 거야.




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끌려다니지 않으리라.








이전 04화 핸드폰이 위험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