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길을 잃었기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정해진 길을 벗어날 때의 가능성

by Eunhye Grace Lee

길을 잃는다는 것은 정해진 무언가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것이 계획이든, 제도이든, 혹은 타인의 기대이든 간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길’은 단순한 이동 경로가 아니라 삶의 방향, 혹은 안전한 틀을 뜻하곤 합니다.


저 역시 어느 순간 그 길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계획했던 대학원 과정을 내려놓았고, 자격증도, 진로도, 이름값 있는 경력도 없이 낯선 땅 위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지도는 손에 있었지만, 저를 이끌어줄 표지판은 사라진 듯했습니다. 그때 처음, 제 안에서 나지막이 울려오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그 길은 정말 네가 원했던 길이었니?”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정의해야 하는 자유로운 존재’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자유롭게 살기보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데 더 익숙합니다. 안정적인 직업, 사회적 명성, 남들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삶...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인지 묻기보다는, 낙오하지 않기 위해 걷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확신이 없어도, 그저 따라가면 언젠가 도착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도착 대신 마주한 것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제 자신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길 잃음이 저를 저 자신과 연결시켰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발밑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그 자리에서 저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었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싶은가?”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후기근대 사회를 ‘자기 성찰적 삶의 연속’이라 정의하며, 삶은 끊임없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길을 잃는다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재구성의 신호였습니다. 방향을 잃은 순간, 저는 길의 끝이 아니라 지금 이 길 위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법철학자 론 풀러가 법의 유효성을 위해 내적 일관성과 방향성을 강조했듯, 인간의 삶도 내면의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으면 결국 길을 잃습니다. 저의 삶 또한 외부의 기대에 맞추느라 내면의 목소리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방황의 시간은 길을 잃은 시간이 아니라 길을 만들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연히 마주한 사회복지 현장은 저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새롭게 던져주었습니다. 처음엔 생계를 위한 일이었고, 언어를 살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안에서 저는 제 손으로 삶을 지어가는 감각을 되찾았습니다. 방향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를 위해 일하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 속에서 천천히 피어올랐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도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경계에 선 이들을 만나며, 저 또한 제 자신이 경계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방인으로, 이탈자로, 실패자로 살던 저의 모습이 사회복지라는 일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저는 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길이 제 안에서 조용히 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타자를 만나는 행위가 윤리의 시작이라면, 제가 진정한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은 타인의 삶과 마주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더 이상 추상적인 인생 계획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안에서 살아 있는 감각,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 나답게 살고자 하는 태도가 저의 길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길을 잃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묻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분명 두렵습니다. 그러나 때로 길을 잃어야만, 진짜 나의 길이 열립니다.


이전 04화1-1.나는 실패한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