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갈수록 더 빠르게 변한다. 코로나로 그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늘 가장 느리다고 구박받던 교육도, 코로나라는 거대한 폭풍에 떠밀려 어찌어찌 그 물결을 쫓아가고 있다. 그에 걸맞게 온갖 연수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나는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그 불안감이 싫다. 그래서 에듀테크 연수라면 모조리 해치우듯 다 들어놓지만, 자고 나면 또 새로운 도구와 앱과 기기들이 줄을 서 있기 마련이다. 이전 것들을 온전히 소화해내지도 못한 채, 나는 또 다른 '신문물'들을 꾸역꾸역 익히고, 수업에 또 적용해 보느라 분주하다.
소화되지 않은 것들은 언젠가는 분명 탈을 일으킨다. 지금 내 수업이 그렇다.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채 또 다른 것들을 쑤셔 넣어 탈이 났다. 철학이라는 것은 희미해지고, 수업의 중심에 있어야 할 아이들은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을지, 혹은 그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해 나가도록 도울지 고민하기보다, 수업을 장식할 화려한 기술과 편리한 도구들을 찾고 익히는데 온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시인 페소아는 그의 저서 <불안의 서>에서 인생을 이렇게 묘사한다.
인생은 누군가 헝클어놓은 실타래다. 잘 감겨 있거나 풀린 채 놓여있다면 그 안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헝클어진 상태라면 인생은 형체 없는 문제이고, 어디로 실을 감아야 할지 모르는 혼란이다.
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내 수업이 딱 그렇다. 견고한 나만의 철학 위에 잘 감겨 있지 못하고 외부에서 주워 담은 화려한 껍데기들로 칭칭 둘러맨 느낌이랄까. 겉은 그럴듯해 보이나 속은 아무 형체가 없는, 그야말로 총체적 혼란이다. 갈수록 교직의 삶은 더 분주해지고, 그만큼 본질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그 텅 빈, 초라한 알맹이를 감추기 위해 더욱 화려한 껍데기를 찾아 헤맨다. 유명하다는 것 중에는 써보지 않은 플랫폼이 없고, 써보지 않은 기기가 없을 정도다. 그렇게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바삐 달리다 보니, 어느새 길을 잃었다.
내 수업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길 원하는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길 원하는가? 그런 질문들이 내 안에서 이따금씩 솟아났지만, 그에 답하기엔 내 일상이 너무도 분주했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수업, 더 새롭고 신선하고 재미있는 수업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민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빠져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의 트렌드를 쫓느라,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들여다보고 매만져주는 일은 점점 귀찮고 번거로운 일로 느껴졌다. 아이들이 신기해하고 반응이 좋으면, 그날 하루 수업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아무 영양가 없는 수업의 연속이었다. 몸에 좋은 야채를 어떻게 거부감이 덜하도록 맛있게 요리해 줄지 고민하는 게 번거로워 간편하고 반응도 좋은 인스턴트식품만 먹이는 격이었다. 수업을 계획하고 고민할 때, 어느새 아이들은 늘 뒤로 밀려나는 1순위 대상이 되었다. 아이들이 내 수업에서 더 이상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버린 거다. 교사로서 내 지위와 커리어를 쌓는 데 사용되는 도구, 여러 가지 수업 기술을 적용해 보는 실험 대상,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기 위한 수업 개발에 이용되는 수단.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이 보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교육트렌드에 발맞춘답시고 이것저것 써보며, 정신없이 휙휙 바뀌는 내 수업 형태와 평가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소중한 내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내 안에도 사명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사명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아니어도 그저 수업에서 나를 만나는 아이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회복되길 간절히 원하던 마음, 저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그 아름다운 빛이 다시 살아나길 바라던 그 작은 마음이 분명 나를 교직에 뛰어들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그 마음은 변질되었다. 수업을 위한 고민의 중심엔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닌, 내가 있었다. 교사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주목받고 싶었다. 앞서가고 싶었다.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나 이만큼 할 줄 안다, 나 수업에서 이런 것도 해봤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유능한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 뒤틀린 욕구는 어느새 더욱 비대해져 본질이 아닌 껍데기에 몰두하게 했다.
잠시 내 수업을 돌아본다. 본래 중심에 있었어야 할 아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수업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화려한 수업 도구들 이면에, 적응하지 못해 중심에서 낙오되는 아이들이 보인다. 영어도 힘든데 스마트기기 사용법까지 익히라고 하니 스트레스로 가득 찬 아이들의 얼굴이 보인다. 영타가 느려 온라인 퀴즈 배틀에서 1점도 따지 못해 오늘도 패배감만 경험하고 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오프라인이냐 온라인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공간에서든, 견고한 철학과 충분한 고민 위에 세워지지 않은 내 수업은 아이들에게 상처만 남기곤 했다.
분명 기술은 이로움을 준다. 에듀테크의 발전으로 업무도, 수업도 효율성이 엄청나게 증대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도구를 넘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순간, 그 세계는 너무도 화려하고 끝이 없어 본질에서 내 시선을 앗아가기 십상이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할수록 본질의 필요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본질을 붙잡고 싶다. 모든 것이 움직일 때, 움직이지 않는 것만이 기준이 될 수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철학이 견고히 세워지길 원한다.
그 중심엔 분명 기술이 아닌 사람, 내 아이들이 있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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