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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Dec 10. 2023

다시 학생이 되는 시간

한순자 씨 이야기




아니, 뭐 문장을 만들어서 어떻게 자기소개를 하라는데 잘은 모르겠네.

내가 그거는 그냥 넘어가도 될까? 된다구? 아유 고마워요.     


나는 한순자예요.     




나이 들어서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더라구.

젊은 사람들도 다들 늘 정신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더라구요. 우리 딸 아들 손주들 모두 맨날 그래.


그런데, 그게...그러니까... 달라요.


젊은 시절의 시간들은 금싸라기 같은 거. 그런 아름다운 시간들이 부산하게 흘러가는 거였지.

하지만 주름진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그저 모래 같은 시간들이에요. 무덤덤하고 아무 의미 없는 그런 거 말이에요.  그런 시간들이 정신없이 흘러간다는 건 어찌 보면 너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아서 그런 거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함께 하던 가게를 정리했어요. 슬퍼할 틈도 쉴 틈도 없이  딸아이가 아이를 낳아 손주를 돌봐주러 가게되었구..

그리고 아들이 결혼을 해서 또 아이를 낳았네...

이 집 저 집 엄마 도움이 필요하다고 난리인걸 어째. 도와달라면 가서 도와줘야지.


그러다 어느 날, 손주들이 훤칠하니 다들 큰 거 보구서는 내가 알았지. 이 아이들이 이제 내 손을 다 뗐구나 하구선.

예상대로 한가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비니까 사람이 좀... 갑자기 더 확 노인네가 된 것 같고.. 갈 때도 된 것 같고... 쓸쓸하고...

사람들이, 세상이 더 이상 나한테 기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구.


누군가가 나한테 기대하는 게 없어지면, 스스로에 대한 기대도 없어지게 되는 건가 싶어.

난 나에 대해서도 그때부터 뭐든지 다 됐다, 괜찮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한동안 누워만 있었던 것 같애. 입맛도 없고 그러니까 괜히 몸도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니 자식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나 봐요.

우리 집 애들이 “엄마, 건강 챙기셔야죠.”라고 말하면서  혹시 우울증 그런 게 아니냐고 걱정을 하더라구. 그리고 운동 같은 거라도 배워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는 거예요. 겸사겸사 밖에 나가 바람도 쐴 겸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 아직 자식들이 나한테 그래도 기대하는 게 하나 남아 있구나 싶더라구요. 뭐겠어요? 건강하길 바라는 거지. 노인네가 나이 들어서 아파봐요. 누가 힘들겠어요? 자식들이 제일 힘들지. 돈도 나가고.


어쩐지 한약이라도 누가 들이부은 듯 입안에 쓴 맛이 나는 거 같으면서도 그래도 이상하게 조금씩 힘이 났어요. 그래,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강해야지. 어쨌든, 자식들이 바라는 건 그거니까. 부모로서의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 살아야지 싶더라구.




리 딸이 그동안 손주들 키워주느라 고생하셨다면서 용돈을 찔러주더군요.

마침 엄마집 앞에 요가인지 필라..테스인지 뭔지 하는 학원이 있다면서 거기를 한 번 가보래요.

그래서 난 그냥 딸 말만 듣고 집 앞 학원을 한 번 가본 거예요.


우리 손녀 같은 아가씨가 카운터에 있길래 나는 그냥 운동 배우려고 왔다구 했지.

그랬더니 뭐 시스템을 설명해 준다면서 핸드폰에서 앱을 깔라고 그러기에 내가 무슨 영문인가 싶더라구요. 그 무슨 학원 앱을 깔면 거기서 수업도 신청하고 시간표며 뭐며 필요한 정보가 다 나와있대요.


설명을 듣는데, 심장이 좀 벌렁거리고 그러더라구. 핸드폰이야 나도 기본적인 건 사용할 수 있지만... 뭐를 깔아서 거기서 뭘 하라고 하니까.. 내가 복잡한 건 자신이 없더라구요.


다음에 다시 온다고 하고 결국 그냥 나와버렸어요. 부끄러웠던 거 같어. 못하니까. 못하면은 당황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뭐 도와준다 하는 것도 민망하고. 괜히 민폐인 거 같고 그렇잖아. 이제는 그런 모르는 게 있으면 저런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쳐다볼까 봐 그냥 피해버리게 돼요.


집에 오는 길에 괜히 화가 나더군요. 나이 들어서도 사람이 이렇게 쉽게 화가 나요. 아니 나이 들어서 더 화가 잘 나는 거 같기도 하네요. 세상이 왜 이런지. 뭐를 해보려고 해도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몰라. 나 같은 사람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다가 운동 뭐 별거 있나, 그냥 동네 산책이나 가고, 뒷산에나 슬슬 올라가고 그러면 운동이지 싶더라구요. 따로 돈 쓸 일이 뭐 있나요.


그런데도 마음이 점점 심란해지기만 하더라구요. 이 나이에 뭘 배우겠나, 배워서 뭣에 써먹나 그랬죠.


그러다가 며칠 뒤에 한의원에 갔는데... 한의원에 왜 가냐구? 아니 나이 들면 그냥 잔잔하게 여기저기 아파요. 여기 어깻죽지가 요즘 아파서 자주 가는 한의원엘 갔지.


거기 간호사님한테 우리 딸이 뭘 배우라 한다고 이런 얘기를 주책없이 늘어놓았어요. 거기 간호사님이 사람이 아주 좋아요.


얘기를 가만 듣더니 글쎄 나한테 요 근처 화실을 한 번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는 거예요. 여기 한의원 다니는 내 나이 또래 환자 중에서도 거길로 그림을 배우러 가는 사람이 있다나. 그림 배우러 다니면서 어깨 아프다고 얼마 전에도 병원에 왔다구 하더라구. 그 얘길 듣고  나를 더 환자 만들라고 그러는 거? 하고  농담도 했지.




그림?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일인데 갑자기 침침한 눈이  밝아지는 거 같더라고요.

생각해 보니까, 내가 어릴 적에 공부도 잘했고 그림도 참 잘 그렸는데.. 뭐 그리고 그냥 살았지. 그때, 여자가 그림을 잘 그려서 뭘 어쨌겠어요. 대학도 못 갔는데. 그냥 그런 걸랑 잊어버리고 결혼하고 일하고 애 낳고 그렇게 쭉 살았지

... 아니.. 어쨌든 그렇게 그 화실엘 가게 된 거예요.


화실에 들어가 보니 거기 그림들이 걸려있기도 하고 바닥에 여기저기 놓여있기도 한데 그냥 그걸 보니까 내 마음이 갑자기 좋더라구요. 그래서 나 여기 다닌다고, 언제부터 오면 되냐구 선생님한테 말했어요. 내일부터 나와도 된다고 미술 재료는 다 준비되어 있고 나는 앞치마만 준비해 오면 된다구 그러시더라구. 앞치마야 뭐 집에 널린 게 앞치마지 뭐.


“여긴 뭐 앱인가 그런걸루 시간 예약하고 그런 거 아니죠?”라고 물어보니까, 거기 선생님이 웃으면서 아니라고 매주 정해진 시간에 나오면 된대. 오는날바뀔 거 같으면 미리 전화나 문자 달라구 하시구. 어휴 얼마나 편하고 좋아요?


그리고 내가 그날부터 학생이 되었어요.

글쎄 내가 한 오십 년도 넘어서 다시 학생이 돼 본 거예요. 선생님이 있다는 것도 좋고, 내가 학생이라는 것도 참 좋더라구.

이상하게, 이건 모른다는 소리가 쉽게 나오더라구요. 누가 뭐라 그러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런가? 누가 이 나이에 그림 그리는 법을 잘 모른다고 나한테 무식하다고 하겠어요?


그리고 여기서 내가 동무도 사귀었잖아. 그 여기 다닌다는 그이. 내 나이 또래 친구. 우리는 같이 그림도 배우러 다니고, 같이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커피도 마시러 다니고 그랬어요.

둘이 같이 키오스크인가 그걸로 여기 카페에서 커피 주문도 처음 해봤어요. 둘이 해보니까 그것도 할만하더라구. 그렇게 거의 일 년이 다돼 가요. 그림 배우러 다닌 지가.      

출처:PIXABAY


이 학원은 일 년에 한 번 학생들 그림을 모아서 여기 카페에서 작은 전시회를 연대요. 이제 2주 남았잖아. 그래서 내가 요즘 아주 바빠요. 그때까지 내 그림을 완성해야 하거든.


그런데 우리 화실 선생님이, 여기 무슨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는 모임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냥 뭐 어려운 것도 아니라구 하고 여기 카페에서 한대. 그래서 내가 한 번 와봤어요. 내가 와도 되는 덴가 잘 몰랐는데 저기 모임장님이 와도 된대서 와본 거예요.


내가 온 김에 요기 전시회 안내문을 주고 갈게요. 혹시 시간이 나면 지나가다 와서 전시회 구경도 하고 그래요. 무료예요. 무료.


아무튼 내가 또 이 나이에 이런 모임 참여라는 건 처음 해보네.

여기서 주책맞게 말이 많았던 거 같은데... 그래도

내 얘기를 이렇게 들어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아이고 박수까지 쳐주고. 내가 어디 가서 박수를 받아보겠어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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