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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Sep 01. 2022

첫째를 중심으로 움직이다 보면

둘째야, 미안해 사랑해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계획 짜는 걸 즐기는 인간(나)과 예상을 벗어나는 일을 싫어하는 인간(남편)이 만나 어마어마한 계획형 인간, 현진이가 태어났다. 조금 크면서부터 현진이는 주말에 무얼 할지를 늘 미리 정해놓았다. 나는 몇 주 전부터 날씨나 상황에 맞게 갈만한 곳이나 할만한 활동의 리스트를 추려 현진이에게 건네주곤 했다. 정은 대부분 현진이의 몫이었다.


유진이가 태어났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제자리에 누워 울거나 먹거나 자는 것밖에 없는 아기에겐, 자라나는 것 말고는 다른 계획이 있을 리 만무했다. 우리의 계획형 주말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어린 아기가 가기 힘든 곳을 갈 때면 부모 중 현진이의 선택을 받지 못한 한쪽이 남아 누워있는 아기와 함께 집을 지키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달까. 아기는 점점 자라며 더 이상 집을 지키지 않고 함께 주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기는 어느새 네 살이 되어, 오빠가 가는 곳은 무조건 가야 하고 오빠가 하는 것은 무조건 따라 해야 하는 오빠 껌딱지가 되었다.




현진이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계획형 가족답게 몇 주전부터 예매해야 하는 어린이박물관 관람 티켓도 (체감상으론) 1등으로 구매해두었다. 그런데 유진이가 걱정이었다. 어린이박물관이야 놀거리 가득한 곳이라 그렇다 쳐도, 조용해야 하고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전시실 관람예절은 네 살 유진이에게 너무 버거웠다. 우리는 이번에도 한 명이 유진이를 적당한 장소로 데리고 나가, 현진이가 조용한 관람을 마칠 때까지 놀아주고 있기로 했다.


유진이는 어린이박물관에서 아주아주 신나게 놀았다. 점심도 맛있게 먹었다. 본격적으로 관람을 해야 하는 시간, 그간 현진이의 역사교육 담당이 나였으므로 자동으로 유진이는 아빠와 함께 있게 되었다. 현진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꼼꼼하게 관람을 했고 그래서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끝나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유진이는 박물관 내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겨우 몇 시간 떨어져 있던 유진이가 너무 보고 싶어 미안한 마음을 가득 안은 채 현진이 손을 잡고 유진이에게 달려갔다. 나를 발견한 유진이는 아이스크림 잔뜩 묻은 입으로 함박웃음을 지어줬다. 아니,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한 엄마에게 그렇게 예쁘게 웃어줄 일이야? 내 딸 천사인가?


후텁지근하고 더운 날이었지만 실내에는 네 살 아이가 소리 지르며 뛰어다닐 곳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 밖에서 조금 뛰어놀다 보면 금세 지쳐 아빠에게 안긴 채로 실내 로비로 들어와 조금 쉬다가, 심심해지면 달리 갈 곳이 없으니 다시 뛰어놀러 밖에 나가는 걸 몇 번은 반복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이제 집에 가자는 말도 두어 번 했다고 한다. 땀에 젖었다 마르길 반복한 유진이의 얇은 머리칼이 많이 헝클어져 있었다. 나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몸을 흔드는 유진이에게 미안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했다. 오빠를 따라다니는 게 일상이 된 둘째의 주말이 참 고단하기도 하지. 짠한 나의 예쁜 딸.

 



나는 여전히 주말에 갈 곳을 정할 때면 현진이를 더 염두에 두고, 대부분의 결정은 현진이에게 맡긴다. 집에서 잘 놀고 있다가도 현진이가 밖에 나가면 나도 밖엘 나가야 한다고 하고, 현진이가 오렌지주스를 먹으면 포도주스를 골랐다가도 오렌지주스로 냉큼 바꿔버리는, 오빠 따라쟁이 유진이는 그렇게 또 오빠의 계획에 당연한 듯 따라나선다. 가끔 유진이가 가고 싶은 곳을 말하면 재빠르게 계획을 변경해 유진이 픽으로 모두 함께 가고는 하지만, 유진이가 그보다 더 자주 하는 말은 오빠의 말 뒤에 따라오는 '나도!'라는 외침이다.

 

나는 유진이를 정말 정말 사랑한다. 세상에서 내 딸만큼 예쁜 네 살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계획이 아주 중요한 우리 가족에게 현진이 위주로 흘러가는 계획이 많다는 사실은, 나를 한없이 부족하고 미안한 엄마로 만든다. 사실 뼈아프게 맞는 말이다. 적어도 유진이에게만큼은 난 많이 부족하고 미안한 게 많은 엄마가 맞다. 어쩔 수 없다며, 이게 최선이라며 해온 수많은 선택이 과연 현진이와 유진이 모두에게 최선이었을까. 나의 선택이 나도 모르게 한쪽으로 기울었던 건 아닐까. '나도!'라는 유진이의  말을 사실은 내가 하게 만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내 몸이 두 개이고 마음의 크기가 두 배라면 좋겠다. 혹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라 아이들에게 반반씩 공평하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다. 부족한 엄마라, 서툰 엄마라 잘 해내기가 너무 어렵다. 미안하고 싶지 않지만 늘 미안해진다. 그리고 가끔은 재미가 없더라도, 나이에 맞지 않아 버겁더라도, 기쁘게 함께 따라나서 주는 유진이에게 정말로 고맙다.


부족한 엄마이지만, 앞으로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엄마이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유진이에게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의 딸 유진아, 나는 너를 나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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