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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Oct 07. 2022

예쁘고 투명하고 따뜻해, 너의 말.

덕분에 행복한 여행이었어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비행기에서.

'엄마, 우리가 사는 집이 저렇게 작은 거였어? 우리 집 되게 큰데 여기서 보니까 장난감 같다.'

(귀가 아프면 침을 삼키라니까)

'햄, 생선구이, 스파게티, 피자....'

'갑자기 왜?'

'엄마, 침을 삼키라며. 맛있는 걸 생각해야 침이 나오잖아!'


제주에서.

'우와, 하늘에 구름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아. 누가 그린 거지?'

'엄마, 저기 봐! 바다랑 하늘이 하나가 됐어!'

(모래놀이를 하다가)

'엄마, 모래 장갑을 꼈네? 저는 털장갑만 있는데, 그건 무슨 장갑인가요?'

(항공우주박물관에서 우주 영상을 몇 회나 감상하며)

'우주 영상을 계속 보고 있으니까 내 마음이 우주로 가득 차는 것 같아'


제주여행을 마치며.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을 데려다줘서 고마워. 정말 행복한 여행이었어!'


함께 제주여행을 하는 동안 현진이가 문득 내뱉는 말이 너무 예뻐 틈틈이 적어두었다. 평소에도 무방비상태의 나를 종종 감탄하게 하는 예쁜 말을 무심히 내뱉곤 하는 현진이는,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다.


이곳에 옮겨 적으며 다시 한번 감탄한다. 참 예쁜 말이다. 말 한마디로 여행을 더 여행답게, 설렘은 두 배가 되게 해 주는, 마음마저 투명해지는 것 같은 예쁜 문장들이다. 현진이는 말을 예쁘게 잘한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2년가량 애쓰다 결국은 실패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말을 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때가 있었다. 아나운서가 되면 꼭 라디오 디제이를 해보고 싶었다. 야자시간이면 선생님 몰래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들으며 디제이의 보드라운 목소리와 멘트에 무수한 위안을 받던 고등학교 시절, 말이 주는 강력한 따뜻함에 문득 나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나도 그렇게 예쁘게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된 마음을 나의 말로 쓰다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짐했었다.


비록 아나운서가 되는 것은 실패했지만, 나는 목소리와 발음이 꽤 듣기 편하고 전달력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말을 예쁘게 한다고 말하기는 머뭇거려진다. 화가 나면 분노를 배설하듯 툭툭 던지는 말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종종 나오는 딱딱한 말투, 흥분해서 놀 때면 문득 튀어나오는 과격한 표현들까지. 아주 어릴 때부터 예쁘게 말하고 싶어 했고 젊은 한 때의 열정을 말에 수없이 쏟아부었다지만, 여전히 말에는 자신이 없다.


반면, 의식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말은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쁠 수 있는지,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투명하게 정화가 되고 있는 기분이다. 기분이 안 좋다가도 마음의 주름이 조금 펴지는 것 같다. 라디오를 들으며 위로를 받던 어린 시절 내가 꿈꾸던 미래의 내 모습을, 아이에게서 본다. 이는 당연한 듯 늘 예쁘게 말을 하고, 종종 말로 나를 더 기쁘게 하고, 아주 가끔은 놀랍게도 나를 가장 잘 위로해준다.




얼마 전부터 현진이랑 유진이가 '헐'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범인이 바로 나였다. '헐'이라는 말이 욕이나 비속어는 아니라 할지라도, 예쁜 아이들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심한 이질감이 들었다. 어쩐지 투명하지 않은 단어. '헐'이라는 단어를 먼저 쓰기 시작한 내가 왠지 아이들의 말을 오염시키는 것만 같아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그리고 희미해졌던 나의 어린 시절 꿈은 그렇게 다시 소환되었다. 예쁜 말을 하는 사람.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패기 같은 건 더 이상 없지만, 나의 아이들을 위해 다시 한번 예쁜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단 마음이 강하게 밀려왔다. 아이들에게 배워야지. 말을 고르고 골라야지. 아이들을 보며 나의 언어도 열심히 정화시켜야지.


아이들의 말은 진짜로 예쁘다. 걸러야 할 것 없이 투명하고, 주저 없이 솔직하고, 감탄할 만큼 맑고 아름답다. 나의 아이들이 아주 오래오래 지금처럼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자라면서 설령 그들의 언어가 오염된다 해도, 다시 쉽게 깨끗해질 수 있는 예쁜 말의 뿌리가 아이들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면 좋겠다. 내 아이들이 다 자란 뒤에도 예쁘고 따뜻한 말로 누군가에겐 행복을 주고, 어떤 이에겐 위로가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번 제주여행에서 현진이의 예쁜 말이 나를 더 행복한 여행자로 만들어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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