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한 살 터울 동생이 있다. 맏이인 나는 너그럽지 못하고 덤벙대는 반면, 동생은 차분하고 신중하고 여간해선 화를 잘 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불쌍한 내 동생은 늘 나 대신 언니 노릇을 해야만 했다. 동생과 내가 함께 자취를 하던 20대 시절 내내, 부모님은 내가 아닌동생에게 전화해 언니를 잘 챙기도록 수없이 당부했다 한다. 천방지축 큰 딸은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면 다행이라 생각하셨겠지. 동생에게만 부탁한 부모님 마음도, 당연한 듯 언니 노릇을 해온 동생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는 나만 챙기기에도 버거운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현진이는 나를 전혀 닮지 않았다. 겨우 일곱 살 현진이는 네 살 유진이를 아주 살뜰하게 챙길 줄 안다. 오늘 백화점에서도 그랬다. 신나게 뛰어다니는 중간중간 유진이가 잘 따라오는지를 살펴보고, 유진이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얼른 달려가 일으켜 세워주는 것도 현진이 몫이었다. 체력 약한 유진이가 벤치에 앉아 쉬고 있으면 힘이 남아도는 현진이도 곁에 앉아서 쉬어줬다.
내가 진심으로 현진이에게 감탄했던 순간은 백화점 안에 있던 작은 실내놀이터에서였다. 격하게 노는 아이들이 꽤 있었고, 덩치 좋은 현진이야 살짝 부딪혀도 끄떡없지만 유진이는 정말로 날아갈 수도 있는 아이라 조마조마했다. 그런 유진이를 현진이는 거의 보모 수준으로 보살피며 함께 놀았다. 계단이 높아 못 올라가면 뒤에서 엉덩이를 밀어주고, 미끄럼틀을 탈 때는 거꾸로 올라가는 친구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먼저 내려가서 지켜봐 줬다. 길을 막는 친구가 있으면 앞장서서 길을 터주고, 느린 유진이가 오빠를 쫓아가다 놓치면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기다려줬다. 유진이는 천사 같은 오빠 덕에 한 번도 부딪히거나 밀리는 일 없이 놀이터를 신나게 즐길 수 있었다. 힘이 넘쳐 동생 같은 건 제쳐두고 혼자 뛰어다녀도 할 말이 없을 일곱 살 남자아이가, 동생을 밀어주고 도와주고 기다려주며 속도조절을 할 수 있다니. 내가 낳았지만 나와는 너무 다른,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넘쳐나는 나의 예쁜 아들.
현진이와 유진이는 세 살 차이이다. 현진이는 세 살 때까지 가정보육을 하다 네 살이 되던 해 3월 처음으로 기관에 갔고,적응을 마치기도 전인 4월 초에 동생이 태어났다. 현진이는 아기 때부터 워낙에 순한 아이였고 그래서 동생의 탄생에 대해서도 큰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육아는 예상대로만 무난히 흘러가지 않는 법. 엄마 없이도 씩씩하게 잘 지냈다던 현진이는 병원과 조리원을 거쳐 내가 돌아온 3주 뒤부터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밤마다 '내일은 울면서 유치원을 가겠다'라는 눈물 예고제를 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등원할 때마다 길바닥을 뒹굴고 도주를 해가며 오열을 했다. 유치원에서도 안 우는 날이 없고, 유치원을 다녀오면 또다시 나를 붙잡고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우는 이유는 매일같이 바뀌었지만 납득이 갈만한 이유는 그중에 없었다.
그렇게 현진이는 자그마치 1년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끝을 모르고 울었다. 바닥에선 갓난아기가 누워서 울고, 좀 더 큰 아기는 내 품을 꼭 붙잡고 울고, 엄마인 나도 어쩔 줄 몰라 같이 울던 1년을 꼬박 채우고서야 현진이의 눈물은 잠잠해졌다. 얼마나 암흑이었는지 기억조차도 사라진 깜깜한 1년간,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건 현진이었겠지.
생각해보면 현진이는 힘든 마음을 표현할 길이 눈물뿐이라 여겼던 것 같다. 고함을 지르거나 공격적 행동을 하는 건 현진이의 매뉴얼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동생에게 나쁜 마음을 갖는 건 교과서 속 바른 아이 같은 현진이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1년간 현진이의 마음앓이는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하루하루였지만 유진이에게만은 예외였다. 동생이 예쁘다며 매일같이 뽀뽀해주고 쓰다듬어주고, 유치원에서는 유진이 자랑을 매일같이 해댔다고 한다. 나 몰래 유진이를 괴롭히거나 못된 말을 내뱉은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진이의 힘든 마음은 오로지 엄마를 향해 있었다. 유진이에게 보여준 것은 늘 사랑이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나도록 현진이는 유진이에게 큰 소리를 낸 적도, 힘을 쓴 적도없다. 유진이가 짜증 내거나 물건을 뺏어도 점잖게 안 된다고만 얘기하고 어쩔 줄 몰라해, 좀 더 강하게 얘기해도 되고 굳이 뺏겨주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혼이 날 지경이다. 답답할 만큼 착한 오빠다. 남편도 나도 각자의 집에서 첫째이지만, 나는 챙김을 받는 사람이었고 남편은 그렇게 무심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부모에게 배운 게 결코 아니다. 타고난 거다. 나에게 오기 전 정말로 천사였던 게 틀림없다. 드라마가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착한 오빠가 도대체 있을 수 있는 건가.
줄곧 이야기했듯, 나는 절대로 나서서솔선수범한다거나 뒤에서 누군가를 지켜주고 챙겨줄 만한 그릇이 못 된다. 현진이의 천사 같은 마음씨가 타고났다고 믿듯, 나의 철없음도 타고났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나도 현진이 같은 심성을 가진 맏이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같은 마무리는 결코 할 수 없다. 그저 현진이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넘치게 감사를 표현하는 수밖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나의 첫째를 실컷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러워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