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며, 스쳐 지나가고, 흩날려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다,
강한 바람에 날아가는 연기처럼.
우리는 도대체 시간이라는 게 뭔지 자문한다.
돌아오는 답은, 모든 게 시간과 더불어
훅 불려 날아가듯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나는 17살 늙은 강아지와 산다. 태어난 지 일 년 반 만에 오갈 데가 없어진 강산이는 함께 살던 여자친구 바다와 헤어져 홀로 내게로 오게 됐다.
눈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털 뭉치가 어찌나 신기하던지... 요 작은 녀석이 먹고 뛰고 자고 배설하는 생명체라니...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맘에 들까? 아침 출근길마다 몇 번이나 가던 길을 되돌려 보고 또 보고... 정신이 몽롱할 만큼 사랑스러운 강산이를 혼자 남겨두고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어린 강산이는 가끔씩 말썽을 피웠다. 선물 받은 가방을 물어뜯거나 휴지를 갈기갈기 찢어 놓기도 하고, 휴지통을 뒤져 쓰레기를 온 집안에 깔아놓기도 했다. 아무 곳에나 오줌 싸는 강산이의 배변 습관을 고치려고 둘둘 만 종이로 바닥을 요란하게 퍽퍽 치며 혼을 냈다. 한 손으론 강산이 엉덩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종이 매로 강산이 머리나 엉덩이를 퉁퉁 치면서...
혼이 난 강산이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어쩌다가 내 손을 벗어나면 침대 밑으로 쏘옥 들어가 버린다. 그러다가 곧 빼꼼히 얼굴을 보이며 내 눈치를 살핀다. 그쯤 되면 어쩔 수 없다. '강산아, 이리 와'하고 손 내밀면 내게 다가와 무릎 위에 앉는다. 쓰다듬어 주면 골골골 소리를 내며 이내 잠이 든다.
내가 강산아, 하고 부르면 강산이는 절대로 내게 달려오지 않는다. 서운한 마음에 소리를 꽥- 꽥- 지르면 한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사는 게 고단할 때마다 강산아, 한번 불러본다. 내가 또 별일 없이 강산아, 하고 부르면 눈을 뜨고 나를 보고 한숨을 푹 쉰다. 사랑이란, 어쩔 수 없는 헤게모니 속에서 존재한다.
어린 강산이는 가끔 누워있는 내 배 위를 펄쩍펄쩍 건너 다니기도 하고,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하며 신들린 무당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곤 했다. 아마도 마음속에서 쿵짝거리는 비트가 일어나는 날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 늙은 강산이는 더 이상 뛰지 못한다. 이제는 걷는 것도 힘이 든다.
그렇게 새침하고 도도했던 강산이는 이제 내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든다. 강산이를 껴안고 영화를 보거나 책 읽는 일상이 행복하다. 내 뒤척임에 잠이 깬 강산이는 고개를 들고 어둠 속에서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강산아,
강산아,
강산아...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