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으로 학교 간 날
클라라와 마크가 함께 탄 경비행기는 엔진 고장으로 바다 위를 정신없이 날아가다가 이름도 모르는 무인도에 불시착했다. 휴대전화도 작동하지 않고 모래와 잡초만 조금 있는, 축구장 한 개 정도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섬에 가까스로 착륙한 것이다. 클라라와 마크는 회복 불가능하게 망가진 채로 갯바위에 걸쳐 있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생수 한 병을 건졌다.
클라라는 경비행기 조종을 배우는 훈련생이고 마크는 경비행기 조종 교관이다. 클라라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휴대전화로 남자친구의 응원 메시지를 들을 때만 해도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마크도 자신의 열네 번째 훈련생이 몸집도 작고 귀엽게 생겨서 스패너 하나도 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마침내 스패너보다 수천 배나 더 큰 비행기를 스스로 조종하는 날이 온 것에 감탄했다.
남자 훈련생들은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잘 해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은 여자 훈련생이다. 어렵게 졸업시킨 자신의 첫 번째 여자 훈련생 미첼보다는 젊고 똑똑한 두 번째 여자 훈련생 클라라의 헬멧을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를 보낸 게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부서진 비행기 잔해 옆에서 찢어진 슈트를 쳐다보며 망연자실하는 순간이 오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엔진 고장을 인식했을 때 클라라는 당장 죽을 것처럼 몹시 당황했지만 마크의 지시를 잘 따라서 바다 위를 마치 활주로처럼 가볍게 미끄러지며 내려앉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에 갯벌에 동체를 처박을 때 갯바위를 살짝 긁으면서 동체가 적잖이 파손된 것은 좀 아쉬웠다.
클라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어쩌죠? 제가 너무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어요. 너무 끔찍해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마크가 말했다.
"괜찮아. 클라라. 비행기는 보험 처리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어쩌다 이런 나쁜 일이 저한테 닥친 거죠?"
"클라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린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나쁜 것만 생긴 건 아니고 좋은 것도 함께 생겼잖아."
"나쁜 건 뭐고, 좋은 건 뭔데요?"
"나쁜 것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무인도이고 휴대전화도 안 터진다는 거지."
"그럼, 좋은 건요?"
"우리가 구출은 되겠지만 조금 시간이 걸릴 테고, 최소한 오늘 밤은 당신과 내가 이 좁은 섬에서 함께 지내게 될 거라는 거지. 어쩔 수 없이. ㅋㅋ"
"오우! 이런. 나쁜 건 이해가 되는데 좋은 것은, 그게 어떻게 좋은 거죠?"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지."
"교관님 말씀을 들으니까 저도 갑자기 좋은 것 한 가지와 나쁜 것 한 가지가 떠오르는데요."
"그래? 좋은 건 뭔지 모르겠고, 나쁜 건 비행기를 고철 덩어리로 만든 건가?"
"비행기가 고철이 된 거에 비하면 교관님도 저도 가벼운 찰과상 말고는 크게 다친 데가 없다는 게 좋은 거죠."
"그렇지. 우리가 운이 좋았어. 그럼 나쁜 건 뭐지?"
"우리가 구출은 되겠지만 조금 시간이 걸릴 테고, 최소한 오늘 밤은 교관님과 제가 이 좁은 섬에서 함께 지내게 될 거라는 거죠. 어쩔 수 없이. ㅠㅠ"
나는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책을 산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까지는 하지 않기에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과감하게 밑줄을 긋고 내 생각 같은 것도 메모를 한다. 내 앞의 독자가 이미 밑줄을 그어 놓은 책도 가끔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앞 독자가 밑줄 그은 부분에 나는 밑줄을 긋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내 앞 독자는 그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나 감동이 되어서 밑줄을 그었을 텐데 난 동의가 절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묘하게도 그가 밑줄 긋지 않은 부분에 나는 밑줄을 긋게 되었다. 같은 책을 읽는데도 책의 끝부분까지 단 한 번도 밑줄 긋는 부분이 겹치지 않는 건 무슨 조화일까 생각해 보았다. 작가의 생각은 모든 독자에게 똑같은 의미로 전달되지 않는 게 분명한 것 같다.
'독자의 탄생은 작가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프랑스 평론가 롤랑 바르트가 말했단다.
졸업한 후 방송 관련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숙제로 'TV 프로그램 분석하기'가 있었다. 그 당시엔 TV 채널이 KBS1, KBS2, MBC, SBS뿐이었다. 숙제는 이런 거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목을 열거하고 프로그램의 성격을 분류하는 거였다. 장르별로 구분하는 것인데, 제시된 장르는 정보, 교양, 오락, 이 세 가지였다. 정보는 주로 뉴스 프로그램, 오락은 <유머일번지> 같은 것. <유머일번지>는 요즘의 <코미디빅리그> 같은 거다. 교양은 오락성 없고 정보성도 약한, 순수한 지식 전달 프로그램. 대략 이런 식으로 모든 프로그램을 구분하고 어느 방송사가 어느 장르의 프로그램을 몇 퍼센트씩 방송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종이 신문을 펴면 하단에 '본 편성표는 방송사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 표시 뒤에 꼭 있는 그날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성표가 있었다. 1주일 치를 모아서 프로그램을 분석했다. 아무래도 주말에는 오락 프로그램이 많으므로 1주일 치 정도는 분석해야 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완성된 숙제만 제출하고 내용은 마음에 1도 새기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장르가 몇 퍼센트를 차지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SBS가 오락 프로그램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보, 교양, 오락, 이 세 가지로 모든 프로그램이 다 명쾌하게 분류가 되더라는 것이다. 만약 요즘 이 세 가지 분류 기준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분류하다가는 머리에 쥐가 나고 그 쥐는 아무도 잡지 못할 것이다. 분류 기준이 훨씬 다양해졌고 뒤섞여져버렸다는 말이다.
한 가지 예로, JTBC에 <정치부회의>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굳이 분류하자면 정보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은 국장의 이름 끝 자가 '복'이어서 '복국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회자와 네 명의 반장이 그날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를 발제하고 발표하는 형식으로 정치 관련 뉴스를 시청자에게 전달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약 1시간 10분 정도 방송하는데 정치적인 뉴스만 집중하여 심도 있게 분석하기 때문에 요즘 정치의 맥락을 잡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기존의 정보 프로그램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은 흔히 알고 있는 정보 프로그램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정보 프로그램에서는 절대로(옛날엔 그랬다.) 해서는 안 되는 오락적인 성격을 아주 많이 갖고 있다. 정치 뉴스를 발표하고 전달하면서 복국장과 네 명의 반장은 자주 티격태격한다. 복국장이 다른 네 명의 반장보다 나이도 많고 직위도 높은데 반장들은 복국장을 은근히 디스diss하기도 한다. 심지어 생방송인데 말이다. 뉴스를 전하다가, 개복 수술했던 환자의 꿰맨 부위가 터질지도 모를 정도로 우스운 오두방정을 떨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개그콘서트>보다 더 쫄깃한 재미가 쏠쏠하다. 말장난부터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과감히 구사한다. 공정한 정보 전달을 생명으로 하는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비틀기'와 풍자도 능수능란하게 시전한다. '저렇게 뉴스 보도를 하는 건 너무 불경스러운 거 아닌가?'하고 어설픈 걱정이 될 정도다. 이 프로그램을 그냥 정보 프로그램으로만 규정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오락 프로그램은 분명 아니다. 정보, 교양, 오락이라는 세 가지의 잣대로는 분류가 쉽지 않다.
내가 '정보, 교양, 오락 프로그램 구분하기' 숙제를 할 때는 각 방송사마다 요리 프로그램이 하나 정도씩 있었다. 우리는 요리 프로그램을 '교양'으로 분류했었다. 한복을 입은 요리 연구가가 출연하여 잘 꾸며진 씽크대 앞에 서서 각종 재료를 사용하여 훌륭한 요리를 할 때 자막으로 재료와 조리법을 그때그때마다 친절하게 보여주었다. 분명히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요즘에는 그런 식의 요리 프로그램은 없다. 요즘의 요리 프로그램은 교양과 정보, 오락이 모두 섞여 있다.
SBS에서 방송하는 <백종원의 골목식당>은 전문 요리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요리에 관한 정보나 지식도 전달해준다. 단순한 음식 요리법이 아닌 인생 요리법을 가르쳐준다. 품격 있는 요리의 교양, 전지적 관찰, 오감을 자극하는 오락 같은 요소와 속성이 섞여 있다. 또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의 플롯을 갖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요리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도 요리를 매개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게 요리부터 판매까지의 모든 과정을 통해 숭고한 인생을 숙고하게 한다.
장르의 구분을 따지지 않고 사용자에게 필요한 지식을 찾아내어 전달하는 범(凡)학문적 행위를 '통섭(統攝)'이라고 한다. 요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통섭'이다. 장르의 형식 규범과 전통적 속성을 따지지 않고 시청자에게 필요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미디어의 소재가 이미 고갈되었기 때문에 소재보다는 전달 방법을 다양하게 꾀하는 데서 온 현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기' 때문에 '통섭'이라는 방법으로 전술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리사는 물론, 스포츠맨, 영화감독, 연예인 매니저, 교수, 정치인, 심지어 깊은 산 속에 혼자 사는 자연인까지 힘들게 찾아내어 그들을 잘 섞어서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출연한 사람들이 자기의 전문 분야인 요리, 스포츠, 영화, 연예인 매니지먼트, 학문, 정치, 혼자 살기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고 전혀 딴 얘기만 한다. 미디어의 소비자는 요리사나 스포츠맨이나 영화감독이나 연예인 매니저나 교수나 정치인이나 혼자 사는 사람의 전문성과 관련된 얘기만 듣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제공해주는 유익한 즐거움을 건지기 원한다. 반드시 뒤죽박죽 섞여야 한다고 시청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가지 분야로는 요즘 같은 멀티플렉스 시대에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복잡한 구조와 혼란스러운 방법을 쓰더라도 '강렬한 욕구'를 채워달라고.
소비자의 욕구는 시대의 흐름을 타면서 '다양성'으로 가는 도화선이 된다. 경계가 허물어진 곳에 새로운 욕구의 꽃이 피고 다양성이라는 열매가 열린다.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이다. 다양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생각에 대해 '일단 인정'하는 것이다. 타인의 자유에 대해 존중해주는 것이다. 타인이 비판을 하든 무시를 하든 동조를 하든 상관없이 일단 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왜곡이나 질서 파괴, 폭력 같은 범죄만 아니라면.
그림책 《알몸으로 학교 간 날》에서 피에르는, 아빠가 깜빡 잊고 늦게 깨우는 바람에 아침밥만 허겁지겁 먹고 알몸으로 학교에 간다. 다행히 빨간 장화는 신었지만 그 위로는 팬티도 입지 않은 완전한 알몸이다. 처음엔 난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도 망각할 정도로 굉장히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도 왜 알몸으로 학교에 왔냐고 묻지 않는다. 친구들과 정상적으로 모든 수업에 참여한다. 심지어 체육시간에도 피에르는 자신의 알몸을 과시라도 하듯 거칠 것 없이 활동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한다. 집으로 오는 길에 피에르는 날아갈 듯이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말한다.
"알몸이 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피에르의 '일탈'을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피에르는 이제 고작 일곱 살 정도 되었고, 아마 학교 규정에도 '등교 시에는 옷을 모두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식의 규정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에르가 몇 살쯤 나이가 들어야 알몸으로 학교에 가는 게 타인으로부터 제지 당할 일이 될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그림책에서는 피에르의 알몸에 대해서 질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실에서는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우리가 다니는 거리에는 알몸으로 다니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이상한' 사람도 참 많다. 그 '이상한' 판단을 하는 기준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관건이기 때문에 그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건지는 논쟁의 여지가 충분, 또 충분하다.
나는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공중 화장실에서 온몸으로 배웠다.
뽑아쓰는 핸드타월 디스펜서에는 항상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두 손의 물기를 모두 제거하기에 한 장으로 충분하다는, 마치 수백 명 이상을 대상으로 실험을 거친 검증된 결과라도 되는 양 당당히 강요하는 메세지에 맞서서 적어도 나는 두 장을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희망한다. 적어도 나는 한 장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나의 자유는 존중받고 싶다. 난 더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난 더 다르게 살고 싶다.
폴란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말했단다. "자유, 그것은 언제나 적어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핸드타월, 그것은 언제나 적어도 두 장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