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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Mar 21. 2019

아재 개그를 우습게 볼 게 아니다

호랑이 잡는 법

네모난 방을 그리고 문을 두 개 만든 후 위쪽 문에 '문'이라고 썼다. 종이를 180도 돌려서 똑같이 '문'이라고 썼다. 위 아래로 문이 하나씩 생긴 것이다. 친구에게 물었다.

"만식아, 봐라. 다 막힌 방이 있는데 이렇게 문이 두 개 있어. 어느 문으로 나가야 살 수 있을 것 같냐?"

만식이의 고민이 깊어졌다.

"아무 데나 나가면 안 돼?"

"안 돼. 어느 한 쪽으로 나가면 반드시 죽어."

"똑같은 문인데, 나가봐야 알지, 어떻게 알아?"

"잘 봐. 한 쪽은 문이고 한 쪽은 곰이야. 곰이 있는 데로 나가면 죽으니까 문으로 나가야 돼. 우화홧."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느 쪽 문으로 나가야 살 수 있을까

나는 문씨다. 나의 성인 '문'을 뒤집으면 '곰'이 된다는 사실을 일곱 살 때 깨달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친구들은 나의 성인 '문'을 아무 이유도 없이 뒤집어놓은 후에 나를 '곰'이라고 놀려댔다. 흔히 알고 있는, '곰은 미련하다', '곰은 느리다'는 식의 성격적인 특성이 있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랬던 것이다. 오씨는 오징어라고 놀리고 박씨는 바가지라고 놀리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나는 몇몇 친구에게 '어느 쪽 문으로 나가야 살 수 있을까' 퀴즈를 더 내고서 그들이 답을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런 단순한 '글장난'에도 민첩하지 못한 애들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위 아래로 똑같은 문인데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보기 좋게 당한 친구는 민망함을 감추기 어려워했다. 이제 와서 깨닫는 것이지만 그것은 아재 개그였다. 친구는 황당해했지만 나는 즐거웠다.


글자를 뒤집는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지만, 사실은 웃음 기교에 대한 철학을 전혀 알지 못한 막무가내 웃음이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상대방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가학적(sadistic) 개그였다.

한편 상대방의 즐거움과 상관없이 본인이 씁쓸한 자해 개그도 있다. 자유한국당의 어떤 국회의원은 '정치인들이 한강에 빠지면 빨리 구해야 한다. 물이 오염된다.'라며 자해 개그를 한 적이 있다.

본인과 상대방 모두가 즐겁기를 원하는 개그가 있다. 아재 개그다. 결과는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를 때가 더 많지만.

아재 부장 : 딸기씨, 딸기씨가 짤리면 그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딸기 사원 : 네? 짤리다뇨?

아재 부장 : 딸기시럽. 하하하.

딸기 사원 : ···. (그게 재밌으세요?)

아재 부장 : 라기는. 웃자고 한 거야. 하하하.


앙리 베르그손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일찍이 웃음에 대해 깊이 연구한 웃음 연구의 선구자다. 그가 쓴 책 『웃음』을 읽어보면 우리가 왜 웃는지를 알 수 있다.

웃음의 형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했는데 상황의 웃음, 말의 웃음, 성격의 웃음이다.


상황의 웃음은 다시 세 가지 기교(mechanism)로 나눌 수 있는데 반복, 반전, 오해가 그것이다.

사건을 새로운 양식이나 환경에서 계속 되풀이하면 웃음이 나온다. 반복이다.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할 수 없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 갑자기 닥치면 웃음이 터진다. 반전이다.

각각의 의미를 중복되도록 섞고 상반된 해석 사이를 우리의 정신이 오가도록 왕복운동을 시키면 웃음이 나온다. 오해다.


말의 웃음도 세 가지 기교로 나눌 수 있다.

어떤 문장이 순서가 뒤바뀐 채로 여전히 뜻을 지니고 있으면 웃음이 나온다. '싸워도 될 걸 말로 하고 그래?'

완전히 독립적인 두 사고 체계를 동일하게 표현하면 웃음이 나온다. 동음이의어의 경우다. '못에서 피가 나는 이유는 뭘까? 모세혈관이 있어서.'

어떤 자연스러운 표현을 다른 양식으로 이전해서도 의미가 얻어질 때 웃음이 나온다. 비유 기법이다. '밤만 되면 우리 집에 쳐들어오는 고래는? 술고래. 니 아빠를 봐라.'  

앙리 베르그손은 말의 웃음을 '말놀이'라고 했다. '언어유희'가 그것이다. 언어에 있어서의 순간적인 방심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격의 웃음은, 다른 사람의 가벼운 결점에 대해 상대방에게 창피를 주려는, 그래서 그의 행위를 교정하려는 은밀한 의도를 드러낼 때 생긴다. 흔히 풍자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사회로부터 고립되면 그는 경직되고, 그 경직성은 웃음의 대상이 된다. 남자들끼리 목욕탕에 갔는데 한 친구가 노란색 팬티를 입고 있다. 다른 친구가 말한다. "야임마, 그 팬티 남성용도 살 수 있냐?"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만식이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과 나누었던 웃음은 말장난의 웃음 기교를 사용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이유도 맥락도 없이 '곰'이라고 놀려대던 친구들의 '가벼운 결점'에 대해 창피를 주려는, 그래서 그들의 행위를 교정하려는 은밀한 의도를 포함시킨, 성격의 웃음 기교도 사용한 웃음이었다.       


가장 평이하고 일상적인 웃음은 상황의 웃음이다. 대부분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웃음이 나다. 만약 의도한다면 그 웃음은 본의 아니게 좀 억지스러워진다.

말의 웃음은 말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하면서도 순발력 있는 실력을 필요로 한다. 평소에 훈련으로 웃음 근육을 갖추어놓아야 필요할 때 꺼내어 쓸 수 있다.

성격의 웃음, 즉 풍자는 고민을 무척 많이 해야 하는 고차원적인 웃음이다. 풍자는 흔히 약자가 강자를 소재로 하여 자주 사용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기본적인 순발력은 물론이고 우수한 지능과 풍부한 지식, 민감한 시사 감수성이 필요하다.

웃음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 절실한 것이다.

그림책 《호랑이 잡는 법》에는 다섯 가지의 '호랑이 잡는 법'이 소개된다. 강원도 할매가 신김치로 호랑이 잡는 법, 하루살이가 절벽 밑으로 호랑이를 떨어뜨려 호랑이 잡는 법, 술 취한 아저씨가 호랑이 꼬리 잡고 버텨서 호랑이 잡는 법, 과부집 강아지가 호랑이를 어지럽게 만들어서 호랑이 잡는 법, 외딴집에 사는 오누이가 호랑이 엉덩이에 나팔을 꽂아 호랑이 잡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호랑이를 잡은 이들은 모두 호랑이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았던 '사회적 약자'다. 이들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한바탕 웃고 말 방법이지만, 그렇게 웃다 보면 호랑이 때문에 공포에 떨었던 날들을 잠시나마 잊고 활력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호랑이 잡는 법》으로 호랑이는 못 잡아도 웃음은 잡을 수 있다.


평소에 아재 개그만 들으면 몸서리쳤던 아재 아닌 이들이 이 책을 보고 나면 와사비 잔뜩 먹은 사람처럼 몸서리를 칠 것이다. 아재 개그보다 서른 배 이상이나 우습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호랑이 잡는 법》보다 더 우스운 상황이 서른 배 이상이나 많다. 너무 말도 안 되게 우스워서 부조리한 상황들은 이미 우리의 뇌리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소화시키고 어떻게 걸러낼 것인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폭소영상만으로 다 해결할 수 있겠는가. 친구들끼리 아무렇게나 주고받는 농담만으로 건강한 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재 : 전주 비빔밥보다 더 천천히 먹어도 되는 비빔밥은?

딸 : 글쎄.

아재 : 이번주 비빔밥.

딸 : 왜?

아재 : 전주 비빔밥이 이번주 비빔밥보다 더 빨리 상할 테니까.

딸 : 헉. 뭐야?

아재 : 그럼, 전주 비빔밥보다 더 맛있는 비빔밥은?

딸 : ···. 다음주 비빔밥은 아닐 거고 ···.
아재 : 너랑 함께 먹는 비빔밥이지. 하하하.

딸 : 호호호.


각각의 의미를 중복되도록 섞고 상반된 해석 사이를 우리의 정신이 오가도록 왕복운동을 시키는 상황 오해의 기교와, 완전히 독립적인 두 사고 체계를 일률적으로 표현하는 동음이의어 기교, 동시에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함께'라는 메세지를 갑자기 던지는 반전 기교까지 곁들인 아재의 비빔밥 개그에 누가 돌을 던지는가.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끌려가던 유신시대에 숨죽이며 겨우 웃음을 배웠고, 엄혹한 군사정권시대에는 숨어서 몰래 웃음을 연습했으며, 결혼반지와 돌반지까지 내다팔아야 했던 IMF 경제위기에도 웃음만은 끝까 지켜내려고 배꼽을 움켜잡았던 아재들이 아닌가.


아재 개그를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아재 개그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천만 아재들은 외롭게 분투해왔다. 따뜻한 여유 한 스푼 섞은 커피잔 옆에 훈훈한 아재 개그 한 조각 올려놓는 게 그렇게까지 몹쓸짓은 아니지 않는가?   

치욕의 역사도 인정해야 하고, 그래서 역사책에도 대대로 기록하며 전수하는데, 이 나라 웃음의 계보를 힘겹게 이어온 아재 개그를 말살하려는 의도는 결코 옳지 않다. 아재 개그가 사라지면 어렵게 이어온 웃음의 전통이 단절되는 것이.

 

아재 개그를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만약 이제부터 아재 개그를 우습게 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다음에 할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아재 개그를 우습게 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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