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남산

~ 짐을 내려놓고 오르는 산 ~

by 강신옥

남산에 올라왔다. 서울 도심에 이렇게 새뜻한 연둣빛 세상이 있다는 것이 큰 축복으로 여겨진다. 등산이라 하기엔 너무 겸연쩍어 서울역에서부터 걸어 올라왔다. 서울역에서 남대문, 힐튼호텔, 남산도서관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남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로선 감회가 깊은 길이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인연을 맺었던 남산길이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가장 많이 다녔던 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상 대학 진학을 못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이다. 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이 셋이었다. 내 형편에 대학을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사실 직장을 잡고 동생들 학비라도 보태야 할 처지였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서 대학을 가기로 했다. 교사가 되는 꿈을 위해 꼭 대학을 가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혼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거의 매일 걸어 다녔던 길이 바로 이 남산길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버스나 지하철을 한 번 타면 올 수 있는 유일한 도서관이 남산 길에 있는 중앙도서관이었다. 아침 일곱 시에 개관이지만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도시락도 싸고 서둘러야 했다. 선착순 입장이어서 일찍 가서 줄을 서 있어야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예전에는 남산에 있었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내려 지금의 이 남산 길을 걸어 오르노라면 왜 그리도 높고 멀게 느껴지던지. ‘하필이면 산길에 도서관을 만들게 뭐람’하며 투덜거렸다. 공부할 책과 도시락 무게가 삶의 무게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이렇게 혼자서 공부해서 과연 진학을 할 수 있으려는지, 앞날에 대한 불안과 어려운 현실이 등에 진 배낭보다 더 무거웠다.


한 걸음씩 가고 있는 내 발걸음이 답답하고, 빤히 보이면서도 멀리 있는 남산이 야속했다. 쌩쌩 달리는 승용차들이 너무 부러웠다. 땀을 흘리며 헉헉대며 올라가노라면 눈앞에 있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나의 꿈과 남산은 닮은 것도 같았다.


때때로 공부가 안되고 마음을 잡지 못할 때면 도서관을 나와 남산 정상까지 올라가 볼 때도 있었다. 말이 산책이지 주변의 나무나 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나무 이름, 꽃 이름이기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모습은 도도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거기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내 현실. 그 편차를 눈으로 확인시켜주던 남산이었다.


도서관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는 대학 진학을 해서 이 힘든 남산 길을 다시 오르지 않고 싶다고 읊조렸다. 그 시절 나의 유일한 소망이 이 남산 길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남산을 오르내렸다. 남산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결국 나는 교육대학을 진학했다. 졸업 후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이었던 교사가 되었다. 힘들게 남산을 오르지 않아도 되었다. 나의 꿈은 이루어졌다. 남산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꿈도 이루어졌다. 남산을 까맣게 잊고 분주히 살아왔다. 평지만 맴돌았다. 걷기보다 차를 타고 빠르게 살았다. 세상의 구석구석을 볼 여유도 없이, 아니 보지 않고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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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이 남산으로 되 구부러져 돌아왔다. 그것도 자주 오르게 되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단순한 등산이나 산책이 아니었다.

나이 들면서, 산처럼 느껴지는 어려움을 만날 때 언젠가부터 남산이 내 마음속에서 되 솟아나기 시작했다. 남산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던 기억이 되살아나곤 했다. 땀 흘리며 한 발 한 발 오르던 남산 길이 다시 삶의 길을 걷게 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으면서도 잊고 살았던 남산이 고향처럼 가보고 싶어 지기 시작했다.


늘 떠나고 싶어 하며 오르던 남산 길에서 나는 남산을 닮아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교사의 꿈을 이루어 대과(大過) 없이 퇴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남산 길을 오르며 몸과 마음에 밴 내공이 한몫을 했다는 생각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돌아온 남산은 퇴직 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었던 허물없는 오랜 친구 같았다. 예전과 달리 남산 길을 느릿느릿 걷는 것도 남산과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리라. 혼자와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산길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냥 익숙함이 마음을 채워 온다.


다시 돌아온 남산은 자연의 넉넉한 정겨움으로 나를 품어주었다. 더불어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정상에 오른다고 일렁이며 소곤거리는 작은 이파리들, 행여 지칠 새라 땀을 닦아주는 바람결, 노래하며 동행해주는 새들까지…….

땅만 보고 걸었던 지난날, 자신들을 외면했던 나를 거부하지 않고 나를 한식구로 받아 주었다.

나도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 이름, 꽃 이름을 하나씩 익혀서 불러주기 시작했다. 그들과 소통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같은 나무, 같은 꽃이라도 철마다, 하루하루 나누는 이야기가 달랐다.



다시 돌아온 남산은 내 인생의 새로운 멘토가 되었다. 사계절의 순환을 통해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나를 키워주었다. 이젠 벚꽃비가 내리는 봄의 남산 길만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나목으로 침묵하는 겨울의 남산 길까지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남산은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내가 몸담고 있는 삶의 터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의 정상에서 산발치에 있는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크고 작은 건물들, 쉴 새 없이 오가는 자동차들. 그 옛날엔 나만 힘들다고 불평했다. 지금도 여전히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땀과 눈물로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데…….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이 순간 남산에 올라와 있는 여유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돌아온 남산은 올라올 때는 산이 나를 품어주고, 내려갈 때는 내 마음에 남산을 품고 내려간다. 삶의 먼지들을 털고 비우고 자연으로 채우고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내 꿈을 이뤄준 남산도서관이 기다리고 있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내 집에 들어가 듯 스스럼없이 들어간다.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읽기 위해 이곳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풍요를 느낀다. 남산 길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큰 기쁨이다. 종이책이 주는 편안함과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 단 몇 시간이라도 책을 읽게 된다. 못다 읽은 책을 빌려서 돌아오는 길, 부자가 된 마음이다.

해질 무렵, 다시 서울역까지 걸어 내려온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소소한 행복의 여운이 가슴을 맴돈다.



“남산도 산이냐?”는 말을 들으면 서운해질 때가 있다. 심산유곡도 아니고, 기암절벽도 없지만 남산은 내 체력과 형편의 치수에 맞다. 젊은 한때 그렇게 오르지 않기를 희망했던 남산이 기실 나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남산에서 다시 에너지를 충전한다.


남산! 산은 그 자리에 그냥 있었지만

이제 예전처럼 무엇을 이루기 위해 오르는 산이 아니다.

삶의 짐들을 비우면서 가벼워져서 다시 오르는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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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 이미지와 이미지 : https : // pixabay. 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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