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불안도 온다

봄도 가을도 싫다. 우울증과 함께라면

by 소위 김하진

나는 봄과 가을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누군들 만물이 기지개를 켜며 소생하는 싱그러운 봄을, 세상이 쓸쓸히 저물어가면서 한숨짓는 가을을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제 봄과 가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봄과 가을이 품은 애매함과 변덕스러움,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어정쩡함. 그로 인해서 느껴지는 불안과 알 수 없는 결핍을 좋아하지 않는다. 달리 보면 여름의 완결이 가을이고, 겨울의 완결이 봄일진대 내 마음은 이미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아름다운 대자연의 흐름을 순리대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나는 봄과 가을이 싫다. 아니 실은 두렵다.


우리의 감정은 경험으로부터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 세상에 그냥 싫은 것은 없다. 설령 누군가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를 펼쳐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는 그 이유란 것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무진기행 속의 무진처럼 안개로 가득 뒤덮인 마음일지라도 끝끝내 두 눈을 부릅뜨고 심연을 향한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길의 끝엔 농담처럼 뻔한 이유란 것이 나를 보며 비웃고 서 있을 것이다. '너는 다 알면서 왜 자꾸 모르는 척하는 거야?'라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나는 왜 봄과 가을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그 뻔하디 뻔한 이유는 바로 남편의 우울증 때문이다.


우울증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다. 특히 봄과 가을. 많은 사람들이 동물적 본능에 따라 밖으로 뛰쳐나가 대지의 기운을 느끼고 아름다운 대자연의 변화에 탄성을 지르고 싶어 하는 이 시기에 이상하게도 우울증 환자는 본능과 역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모두가 그러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남편은 그랬다. 죽도록 힘들었던 시기들의 이유를 찾고 또 찾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그래, 봄이었어, ' '그래, 가을이었지.' 하는 씁쓸하고도 허망한 결론이 남았다. 그럴 때면 패전국의 너덜너덜한 깃발이 가슴속에서 쓸쓸히 펄럭거리곤 했다. '봄'과 '가을'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채로...


몇 년 전 가을, 그리고 봄. 그는 심각하게 무너져 내린 적이 몇 차례 있었다. 일상생활을 한다기보다 일상이란 것이 하루에 한두 번 잠시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삶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태반이었고 간신히 회사에 가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하루를 보낸 후 집에 오면 그냥 쓰러져 잠을 자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그는 오전이 죽도록 괴롭고 오후가 되면 그나마 업무를 조금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회사를 다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지만 휴직하지 않고 끝끝내 버티고 버텼다. 하지만 오후의 짧은 회복을 위해 나머지 시간은 시체처럼 지내기 일쑤였다. 그는 언제나 잠만 잤다.


초점을 잃은 눈, 공허한 신체의 움직임 등으로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예리하게 관찰하지 않는 이상 그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병과 싸웠고 나는 조용히 그의 곁에서 숨죽인 채 지켜보기만 했다. 정말이지 자도 자도 끝도 없이 잠만 자는 그를 바라보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남편은 있지만 없는 존재였고 없지만 있는 존재였다.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를 보면 한없이 안쓰러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따뜻한 밥뿐이었고 이따금 얼굴을 마주할 때 짓는 동그란 미소뿐이었다.


아들에게는 아빠의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댔다. 아프니 자는 것이고 자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자며 아이를 도맡아 보살폈다. 평일에는 아침에 유치원에 맡기고 일하러 가고 다시 아이를 찾아와서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자고 다시 다음날이면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주말이면 종일 자는 남편을 위해 아이와 단둘이 밖에 나가거나 이따금 남편의 정신이 조금 돌아오면 함께 밥을 먹고 잠시 외출을 하기도 했다. 남편은 한 공간에 있어도 머나먼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 같았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익숙해지면 다 견딜만해진다. 전혀 일상적이지 않아 보이던 우리의 일상도 차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즐거운 조울증'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즐거운 조울증이라니,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싶었다. 하지만 그 책의 인물들은 정말 그랬다. 우울증을 앓는 아빠를 대하는 아내와 딸 둘 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나 역시 조금은 무심한 태도가 환자에게도 환자 가족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무관심하면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환자의 상처나 자책을 더 키울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울지언정 남편과 함께 있을 때에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남편 몰래 남편의 상담 선생님과 통화한 적이 있었다. 앞날이 너무 두렵고 캄캄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상담 선생님은 냉정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냥 놔두세요.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해 주세요. 만약 너무 괴로워서 일을 그만두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해 주세요. 그럼 안 되나요?"

말문이 막혔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남편의 건강이었을까? 나와 아들의 안위였을까? 순간 부끄럽기도 했다. 그 후로 스스로 마음을 고치고 또 고쳐 먹었다.

'그와 나는 별개의 인간이다. 그의 삶은 그에게 달렸고 나의 삶은 나에게 달렸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나는 내 삶의 몫을 견뎌야 한다. 그가 만약 이대로 회사를 그만두고 병원에 들어가 버린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또한 그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이다.'


엄마의 차가운 태도도 내겐 도움이 되었다. 여느 엄마들처럼 애태우고 속상해하며 딸 걱정에 한숨짓지 않았다. 엄마는 정말로 냉정하게 이런 말로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몸에 불치병이 걸려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 계속 잠만 잔다며. 그냥 자게 놔둬라."

나는 엄마의 말에 실소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고 무엇보다 내겐 어린 아들이 있었다. 나는 독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일을 하다가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면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 몰래 울었다. 눈물을 닦고 돌아와서는 다시 웃으면서 일을 했다. 그리고 집에 오면 아이랑 놀아주었고 밤이 되면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함께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단순한 일상의 반복만으로도 어떻게든 굴러갈 수 있었다.


또 가을이 온다. 가을이 오는 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려오면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때보다 남편의 눈치를 더 많이 살피고 그가 한숨이라도 쉬면 마치 절벽으로 내몰린 듯한 불안감에 절절매기도 한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늘 불안 속에 떨고 있다. 그의 몸과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민하게 촉을 세우고 사는 것이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또한 내 삶의 몫이리라.


아무리 불안하고 두렵더라도 하루치의 삶은 그저 조용히 흘러간다. 나는 가을을 온전히 즐기진 못한다 해도 이따금 피부에 닿는 시원한 가을바람, 나뭇잎들의 찬란한 변화, 콧속으로 들어오는 청량한 가을의 냄새까지 거부하지는 못한다. 하루의 대부분이 비일상적이어도 잠깐의 일상이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듯이, 가을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 느끼는 것도 나에게는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무언가를 온전히 만끽하며 살지는 못한다. 나는 이것이 오직 나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괜찮다.


가을은 불안과 함께 내 곁으로 자꾸만 다가오고 있지만 이번 가을은 조용히 흘러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섣부른 희망도 성급한 비관도 옳지 않다. 그와 나는 나란히 각자의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그 가을이 어떠한 모습이어도 상관없다.


가을도. 나의 불안도. 그의 우울증도 결국은 또 지나가버리고 말 테니까....


출처 무아, '연필로 그리는 풍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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