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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경 Jun 05. 2022

밤은 책 읽기 좋잖아.

소은이의 고백

 소은이가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난날에 대한 고백이다. 과거를 회상하고, 지나간 일에 대해 반추하는(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아 내심 대견했다. 다섯 살이 아기 때 일을 기억하고, 지금의 일과 연상 지어 생각할 줄 알다니.
 

 첫 고백은 밥을 먹으면서 이뤄졌다. 우리 부부는 평소 실수로 한 잘못에 대해서는 잘못을 꾸짖지 않는다. 대신 잘못된 행동에 고의성이 있으면 혼을 냈다. 어느 날 아이가 식탁에서 밥을 먹다 반찬을 흘리고 곧바로 내게 사과를 했다.


S: 엄마, 내가 계란 떨어트려서 정말 미안해.

M: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S: 응, 근데 나 옛날에는 밥 먹기 싫어서 일부러 떨어뜨렸는데.


 그러면서 빙그레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먹기 싫어서 일부러 반찬을 흘린 적이 있다니. 어린 아기니까 반찬을 떨어트리는 것은 당연히 실수라고만 생각했다. 그 안에 의도가 담겨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 못 하는 아기의 행동에도 소박한 반항이 숨어있었구나. 지나간 일로, 그것도 아기 때 일로 아이를 혼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멋쩍게 웃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모처럼 차에서 소은이를 재우기 위해 야간 드라이브를 시도했다. 아기 때 누워서 잠을 안 자던 소은이를 카시트에 태워 재우곤 했었다. 이날은 마침 친정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잠이 들면 딱 좋을 타이밍이었다. 남편과 사인을 주고받고 아이에게 말했다.  


M: 소은아, 차에 기름 넣고 가자.

S: 기름이 뭐야?

M: 아, 차가 배고파서 밥 주는 거야. 밥 주고 가자. 소은이 피곤하면 차에서 눈감고 있어도 돼. 엄마도 눈 감고 있을게.

S: 응, 그럼 엄마는 자고 있고, 나는 아빠 운전 잘하는지 보고 있을게.(진지하게)


 나는 아이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너를 재우기 위해 주유소에 가는 건데 네가 안 자면 무슨 소용이니! 나는 오늘도 쉽게 재우기는 틀렸구나 싶어 바로 체념하며 말했다.


M: 그럼 그냥 집에 가자.

S: 차에 밥 주고 가자. 차가 배고프대.

M: 그럼 소은이도 자는 거야.

S: 응, 알았어. 근데 안 잘 수도 있어


(드라이브하며)

S: 밤 되니까 정말 좋다. 난 옛날에는 밤을 싫어했는데 이제는 밤이 조금 좋아졌어.

M: 왜 밤이 좋아졌어?

S: 밤은 책 읽기 좋잖아. 난 책 읽는 거 진짜 재밌거든. 아침엔 티브이가 더 재밌고. 밤에는 엄마 아빠가 티브이 보면 안 된다고 그래서. 책은 된다고 해서. 밤에는 책만 읽는 거야.

 

 역시. 소은이는 밤을 싫어한 게 맞았다. 아이의 입으로 밤이 싫었다는 고백을 들으니 한편으론 후련했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그렇게 목놓아 울었던 건가. 한편으론 이제는 밤이 조금 좋아졌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그 이유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긴 했지만. 책 읽기 좋아서 밤이 좋아졌다는 제법 어른 같은 아이의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면 책을 엄청 좋아하는 줄 알겠네.


 사실 아이가 밤마다 잠자리에서 책을 더 읽어달라고 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정말 책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 자기 싫어서 책을 읽는 건지 알쏭달쏭하다. 책 읽는 게 진짜 재미있다면 낮이고 밤이고 책을 봐야 할 텐데 사실 낮에는 통 책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 아기일 때 혼자 책을 꺼내고, 스스로 책장을 넘기는 일이 많았다. 그때는 내가 한참 책 유아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기도 했다. 아이에게 다양한 책을 접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에 책을 계속 바꿔주기도 하고, 도서관에도 많이 데리고 갔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어린이 도서관을 매일 드나들고, 그곳에서 책을 읽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는데. 내가 아프고 나서 자연히 책 육아와 멀어졌고, 지금은 잠자기 전에 겨우 책을 읽어주는 것이 독서 경험의 전부가 되었다.


 그림책 육아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소은이의 말대로라면, 소은이는 밤에 책 읽는 게 재밌다는데 계속 밤에 많은 책을 읽어주면 되는 걸까? 표준치료도 끝나고, 일상을 회복하고 나니, 슬슬 책 육아에 대한 고민과 욕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책 읽는 것을 진짜 좋아한다는 소은이의 고백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다시 열심히 책을 읽어주는 엄마로 돌아가고 싶었다. <푸름 아빠 거울 육아>의 저자인 푸름이 아빠는 아이가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밤새 책을 읽어줬다지.

 

 결국 더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3년 전 탈회했던 어린이 도서연구회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예전 기록을 찾아보니 소은이가 13개월일 때, 어린이 도서연구회에 가입해서 1년 동안 활동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지극정성이었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그림책을 읽겠다고 그림책 모임에 가입하다니. 그때 코로나가 터지지 않았다면, 계속 활동을 지속했을 텐데. 코로나로 대면 모임이 금지되고 나도 직장에 복직을 하면서 어린이 도서연구회를 탈회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아쉬웠다. 하지만 아이가 다섯 살이 된 지금이야말로 아이와 그림책을 도란도란 읽을 적기 아닌가.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하게도 그때 만난 분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환영해주고 반겨주셨다.  앞으로 어떤 그림책의 세계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두근거리고 설렌다. 


 소은아, 네 마음을 얘기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네가 읽어달라고 하는 만큼 실컷 책 읽어줄게! 낮이고, 밤이고 책 읽는 게 좋아질 만큼, 엄마가 좀 더 노력해볼게!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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