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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니 Aug 13. 2023

나 자신과의 관계

‘엄마로서의 나’에 대한 기대와 실망


  3주 전쯤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문구를 생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아래의 글을 쓰다가 중간에 생각이 멈추어 저장해 두었다.



<끝마치지 못한 글>


"우리는 서로를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 ‘보통의 언어들(김이나)’ 중에서


  얼마 전 '보통의 언어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평소 TV에서 많이 보던 김이나 작사가가 쓴 책이어서 어떤 단어들로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해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작사가답게 참신한 표현과 비유들이 눈에 띄었다. 그중 본인이 라디오에서 했던 말인 위의 문장을 인용하여 '실망'이라는 단어에 대해 글을 써 내려간 것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글의 마지막 부분도 다시 읽어보게 된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서는,
나는 누군가와 진실로 가까울 자신이 없다. 우리, 마음껏 실망하자.
그리고 자유롭게 도란거리자.

- ‘보통의 언어들(김이나)’ 중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가 아닌 '글을 쓰기 시작한 나'와 '그 글들을 다시 읽는 나'를 생각했다. 쓸 때는 열심히 쓰고 최선을 다해 퇴고하여 글을 완성하지만 다시 읽어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런 글을 보며 스스로에게 실망을 했다. 그래서 '쓰는 나'와 '읽는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요즘 글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해서일까. 글을 쓰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예전에 혼자서 공책에 그리고 메모장에 끄적거릴 때에는 사소한 글감을 가지고도 마음과 머리를 활짝 열고 꼬리에 꼬리를 달아가며 그 생각을 써 내려가던 나였는데, 이제는 글감을 보고 이것이 글을 쓰기에 적절한 것인지 생각해 보는 단계가 생겨났다. 글을 쓰면서도 어디까지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순수하게 나의 감정을 쏟아내고, 머릿속에서 빙글거리며 돌아다니던 글감에 하루종일 살을 붙여가며 만들어낸 생각을 뱉어내던 처음의 글쓰기. 그때는 나와 글 사이에 실망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저 생각나면 연락하는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래도 생각하면 기분 좋은 친구 같은 사이였다. 그러나 요즘 매일 만나는 사이가 되자 나와 글 사이가 생각보다 가까워졌고 그러다 보니 기대와 또 그에 따른 실망이라는 감정들이 우리 사이에 파고든다. 그렇다고 다시 멀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책에서 저 문장을 본 것이다.




  위의 글을 써놓고 끝마치지 못했다. 거의 보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 글을 끝내지 못한 이유는 '쓰는 나와 읽는 나의 사이’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글을 쓰다가 영 마음이 찜찜하여 멈추게 되었던 것이다.


  서로 실망하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 관계. 작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고 가까워질 수가 없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다. 나와 절친한 친구도, 가족도, 배우자도 나에게 실망한 적이 있을 테고 나도 그들에게 실망한 적이 있다. 그 순간들이 지나고 서로의 부족함을 품어주고 나니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워지지 않았다. 물론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 소중한 관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그래도 그 관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내가 실망시켜도, 그들이 나를 실망시켜도 우리의 관계가 끝나지는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실망하는 것이 두려울 때가 생긴다. 그것은 글쓰기의 한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으로서, 직업을 가진 직장인으로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이다.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다 차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정한 기준 내에 들지 못하는 것이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평소 내가 무척이나 엄격하고 높은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끝마치지 못한 글과 찜찜한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깨달았다. 나는 엄마라는 역할을 가진 나에게는 꽤나 높은 기준을 갖는다.




  최근 나에게 새로 생겨난 역할들이 있다. 학부모가 된 나, 휴직을 하고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나. 새로운 역할을 위해 그동안 내가 보아온 좋은 롤모델들을 생각하며 높은 기준들을 들이댔다.


  마음먹고 1년 동안 휴직을 하기로 했던 순간부터였다. 이 기간 동안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한 부분들을 복직하기 전까지 만족스러운 상태로 만들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검진들과 가르쳐놓아야 할 공부와 습관들. 집안의 정리가 필요한 부분들과 장만해야 할 살림살이와 버려야 할 물건들. 그동안 미뤄두었던 아이들의 학업 계획과 복직할 때를 대비한 아이들의 오후 일정에 대한 고민.

  휴직 기간 동안 내가 소홀했던 일과 복직을 위한 준비를 알차게 해내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1년 안에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나는 1년 동안 이것을 다 해내라고 나 스스로에게 안달복달했다. 내가 본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런 일들을 야무지게 그리고 빠르게 처리해 내는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혹은 내가 그들이 겪어낸 과정이 아닌 잘 해낸 결과만을 보고 달린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내가 스스로에게 내준 과제들을 만족스럽게 해내지 못하자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고 결국 병이 났다. 둘째 아이의 학교 입학과 적응이 어느 정도 되었다 싶었던 4월 말쯤부터 몸이 아팠다. 식도염으로 한 달이 넘게 약을 먹으며 고생했다. 음식도 조심하며 먹어야 했고, 좋아하던 커피와 탄산음료도 모두 끊었다. 겨우 제 컨디션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했다. 다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방학 동안 비장해지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그리 말했건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는 여러 목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식도염이 도지고 말았다.


  식도염으로 내가 느끼는 주증상은 가슴 답답함과 두통이다. 이 증상들은 모든 것에 의욕과 에너지를 잃게 만들었다. 결국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청소와 밥도 최소한으로 했으며, 브런치 방문은 가끔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께 감사의 답글만 다는 정도였다. 밥과 약을 챙기고 휴식을 취했다. 쉬는 시간에는 누워서 뒹굴거렸다. 한동안 나를 나태하게 만드는 것 같아 보지 않았던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끼리 놀도록 그냥 두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던 TV프로그램도 전보다 더 길게 보여줬다. 내가 조금 더 편해도 덜 열심히 해도 괜찮다고, 그런 엄마여도 별일 없다고 자꾸 마음속으로 말한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엄마로서의 나’가 계속 생각난 이유가 지금의 상황 때문이었다. 나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며 무리한 기준을 세웠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추지 못한 나 자신을 보며 실망했다. 결국 병이 나고서야 그만하자며 내려놓는 것이 포기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있었다. 포기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포기한 적이 없고, 결코 포기할 수도 없으니 억울한 마음이 든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아이들의 성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역할은 계속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렇기에 늘 새로운 목표와 과제들을 가지며, 그것을 위한 기준들을 마음속에 세운다. 그 기준들은 이상적이다. 내가 되고 싶은 훌륭한 부모의 모습을 생각하며 세운 기준들이니 당연히 거기에 맞추는 것은 힘들다. 그러면 그 기준들을 조정해야 하는데 그 높이를 낮추는 것이 아이들에 대한 내 사랑과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이다.


  이 끊을 수 없는 굴레에서 내가 나를 잘 바라봐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성장과 계속되는 변화에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매번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며 노력하지만 실망스러운 날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적인 모습과 다른 나에 대해 실망만 하기보다는, 그 모습을 나에게 알맞도록 변형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실망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고 엄마로서 나는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더 알아가야 한다.


  여전히 약을 먹고 머리가 무겁지만 아이들 숙제를 시키며 같이 앉아서 글이라도 쓰자 싶어 오랜만에 노트북을 열었다. 이 글을 완성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그동안 저장해 둔 글 중에 아프면서도 유일하게 생각난 글이었기 때문이다. 전에 글을 끝마치지 못하게 만든 그 마음의 찜찜함이 마음속의 수수께끼처럼 남아있었다. 그런데 실컷 아프다 보니 글을 쓰지는 못한 채 생각만 했고,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이 시간을 마음먹은 만큼 잘 보내지 못할까 봐, 나중에 후회하고 실망할까 봐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실망하는 것이 싫어서 너무 힘을 주고 나를 끌고 가려다 무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진짜 문제는 ‘엄마로서의 나’와의 관계였다는 것을.

  ‘나’를 ‘너’처럼 바라보며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 위로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너를 더 알아가는 과정이라며 친근하게 다가가면 되는데 스스로에게는 그걸 할 생각을 못했다.


  이 책에서 읽은 '실망'이라는 글이 가진 소제목 '우린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새겨 넣으며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 자신과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이가 되자. 진실로 가까운 사이가 되자. ‘우리, 마음껏 실망하자. 그리고 자유롭게 도란거리자. (김이나 작가가 책에서 말했듯이)’


  ‘나’ 그리고 ‘엄마로서의 나’. 우리 더 친해지자. 실망시킬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평생 진심으로 편한 사이가 되자. 서로 다독이며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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