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레니 Jul 17. 2023

느려터진 아이

기다림을 배운다

  

  우리 집 둘째는 행동이 느리다.

  아기 때 걸음도 늦고, 말도 늦더니.. 지금은 뛰기도 하고 말도 잘하는데, 이제는 그냥 느리다.


  둘째 아이는 생일이 늦어서인지 또래보다 키도 작고, 언어와 신체 발달이 유달리 늦되어 더 신경이 쓰이는 아이다.

  올해 학교에 입학할 때도 일렬로 서있는 아이들의 얼굴들 사이에서 둘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움푹 꺼진 그 아래로 시선을 내려야 보이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그저 안쓰럽고 걱정되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엄마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굉장히 태평하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강당에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아이들이 오는 순서대로 의자에 앉았다. 아이들은 긴장한 마음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확인하고, 두리번거리며 옆에 앉아있는 아이들도 살펴본다.

  그중 이 아이만은 달랐다. 줄의 중간쯤에 있는 의자로 안내된 아이는 책가방을 의자에 내려두고 자리에 앉았는데, 제 집 소파에 앉듯이 책가방을 쿠션 삼아 뒤로 턱~ 기대고 머리는 패딩점퍼 모자를 배게 삼아 등받이에 둔 채 반쯤은 누워 앞만 바라본다. 아무리 기다려도 뒤를 돌아보지 않기에 옆 쪽으로 자리를 옮겨 ‘나를 알아봐 달라, 엄마 여기 있다’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보고 씩 웃더니 다시 앞을 바라본다. 세상 쿨한 남자다.


친구들 뒤에 안락하게 앉아있는 둘째(제일 뒤에 앉아있는 아이입니다.)


  다음날부터 제시간에 등교가 시작되자 아침에 깨우는 것부터 먹는 것, 씻고 옷 입는 것까지 전쟁이었다.

  첫째와 달리 이 아이는 하나같이 급함이라고는 없었다. 첫째 아이는 벌써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데, 이제야 아침밥을 우물거리며 세수와 양치를 하러 화장실로, 그것도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이제 곧 나갈 시간이라고 재촉해도 긴장한 기색이 하나 없다.

  학교 앞에 도착하니 현관에 들어가기 전 스탠드 계단에 척 앉는다. 그 옆에 서서 실내화를 잽싸게 갈아 신고 신발을 주머니에 넣고 기다리는 첫째와 달리, 이 아이의 여유로움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분주함이 느껴지는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우아한 백조 한 마리가 연못에 노닐듯이 평온하다. 실내화 가방에서 실내화를 하나씩~ 하나씩~ 꺼내고, 운동화 한 짝을 벗고 실내화를 갈아 신고, 또 한 짝을 벗고 실내화를 갈아 신은 후, 운동화를 또 하나씩~ 하나씩~ 신발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일어선다. 옆에 있는 형아는 속이 터진다. 엄마는 속이 더 터진다. 유유히 나에게 손을 흔들며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한 번 내쉰다.


  아직 손이 야무지지 못하고 서투른 부분이 많아 늦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달리기를 할 때 뒤뚱거리는 뒷모습, 책가방을 맬 때, 우산을 펴고 접을 때, 신발을 신고 벗을 때에도 아직은 자연스럽지 못한 그 손과 발의 움직임을 보면 안쓰러워도 도와주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여 기다려준다. 서투른 탓에 느린 것을 타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민과 결정까지 느린 것은 왜 그런 것인가. 때로는 하던 것을 계속하고 싶어서 혹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해서 늦장을 부린다 치자. 그런데 슈퍼에서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고를 때도 왜 그리

오래 걸리는가. 이런 것을 기질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이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혼자서 헛웃음이 나온다. 생각해 보면 이런 기질은 익숙하지 않은가.

  이건 바로 나니까. 인터넷 쇼핑으로 옷을 사도 장바구니에 넣어뒀다가 계절이 지나 사지 못하고, 아파트 관리비는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송금하고, 외출을 하자고 하면 가족 중에 제일 마지막에 씻는 것은 나이지 않은가. 그런 나인데도 나와 똑 닮은 내 아이를 보고 속이 터진다.


  나는 어느 날 친정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엄마도 많이 힘들었겠다."

  엄마는 이제야 그걸 알겠냐는 듯이 말한다. "어휴~ 그걸 말이라고 해. 숙제하라고 하면 책상에 앉아서 뭘 하는지 꼼지락거리면서 밤이 되어야 끝나고, 씻으라고 하면 화장실 들어가는데만 한 세월이고. 굼떠도 그렇게 굼뜬 굼벵이도 없었을 거다!"


  그래도 엄마는 웃으며 얘기한다.

  나는 안다. 왜 엄마가 치를 떠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얘기하는지를..

  내 아이를 보고 나도 느끼니까.. 아이는 느리지만 대신에 꼼꼼하고 끈기가 있다. 양치질이 오래 걸리지만 이쪽저쪽 깊은 곳까지 나름 최선을 다한다. 운동화를 신을 때도 오래 걸리지만 구겨진 곳이 없는지 점검하며 바른 모양으로 신는다. 수학 숙제를 하는데 맞는 답에만 동그라미를 치면 될 것을 오답도 하나하나 다 확인하며 엑스자를 그려 넣는다. 바이올린 연주를 해준다며 한 번을 끝내고는, 활을 제대로 잡지 않았다고 다시 연주하는 아이다. 느리지만 제 딴에는 제대로 해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족해야 제대로 되었다 생각한다.


  어쩌면 다른 엄마들은 느리더라도 제대로 꼼꼼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냐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아이의 느림을 매일 겪어본다면 ‘덜렁거리지만 신속한 성격’과 ‘느리지만 신중한 성격’ 두 가지 중에 고르는 것이 고민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첫째 아이가 전자의 유형에 속하므로 둘 다 겪고 있는데 누가 더 낫다 말할 수가 없다. 흔히 말하듯이 일장일단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반씩 섞어놓고 싶다.


  하지만 아이를 예쁜 그릇 빚어내듯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림이다. 첫째 아이는 스스로 살펴보고 빠트린 것을 발견할  있는 시간을 주며 기다려야 하고, 둘째 아이는 촌각을 다투는 순간에 속이 터져도, 울화가 치밀어도 ‘평정심이라는 말을 되뇌며 눈을 감고 기다려줘야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엄마..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기다려줘서 고마워. 나도 엄마 같은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게.’


이전 17화 나 자신과의 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