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할 때가 많았다. 첫 배낭여행에서 만난 J를 좋아하게 되었을 땐 이 사람과 함께 평생 숲 속에 처박혀 둘이 살 수만 있다면 꿈도 가족도 다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인생의 의미가 이 사람으로 인해 오롯이 완성될 것만 같았다. 같은 학교 동기인 K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우연찮은 계기였다. 몇 년 만에 복학해 학교에 갔다가 우연히 건물 반대편 복도를 지나는 널 보았을 때(넌 대학원생이었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아무것도 재지 않고 한참을 돌아 그리로 달려갔었다. 공항에서 일할 때 알게 된 C는 바라만 보아도 눈이 부시는 사람이었다. 우연히 근무가 겹치기를 바라며 루틴을 돌다 그 사람을 만나 30분간 함께 있게 되면 황홀함에 내내 몸이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좋아하게 된 건 조금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내게 좋아함이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게다가 세상을 떠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게 되지도 않았다. 난 한눈에 반해 누군가를 좋아하곤 하는데 사실 난 당신에게 반한 적도 없었다. 그러다 어떤 이유로 당신의 집에 오랫동안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아침마다 당신이 내가 자는 거실의 문을 빼꼼 열고 아기처럼 환히 웃으면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 그 작고 따듯한 웃음을 꼬옥 안아주었다. 당신이 친구들과 오랜만에 물놀이를 갔다가 나랑 놀고 싶다며 땀을 뻘뻘 흘린 채 일찍 돌아왔을 때, 당신은 당신한테 땀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이 입고 있던 옷의 무늬처럼 꽃향기를 맡았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깼더니 당신이 거울 앞에서 수트를 입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아마 그 순간 반했던 것 같다. 나중에 당신이 말하기를 아침에 일어나 거실 문을 열었는데 내가 아직 자고 있으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나는 마음이 상쾌해 꽃을 한 다발 사들고 당신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갔었는데, 당신이 나를 보더니 온통 부끄러움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으로 슬금슬금 달아났다. 다음 날 아침 내가 자고 있는 당신이 예뻐 볼에 뽀뽀를 해 주었을 때 당신이 깨더니 입술에 뽀뽀를 해도 되냐고 물었고, 10분 뒤에 우린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그 뒤 여러 국가에서 함께 지냈다. 바로 옆 국가에서 지낼 때는 주말마다 당신이 나를 보러 왔었고, 공항에서 일주일 만에 만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신이 날 향해 걸어오는 한 발 한 발에서 나는 새로 반했다. 당신은 내게 햇살 같다고 했고, 내가 머물던 방에서 당신에게 기타를 쳐줄 때 날 보며 왜 이제야 당신 앞에 나타났냐고 눈물을 보였다. 우린 탁심 광장을 지나 작은 골목으로 당신의 첫 기타를 함께 사러 갔었다.
어느 날 나는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해 들고 오다 저기 앉아있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가여워졌다.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가여움을 느낄 때 나는 문득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곤 한다. 우리는 3년을 만났고, 힘든 시기에 헤어졌다. 그날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어 집에 가며 나는 수 없이 괜찮다고 되뇌었다. 나는 그 뒤로 당신을 사랑했던 이유도, 당신을 사랑했던 순간들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다 기억하려 했다면 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헤어지고 우리는 몇 번을 더 밝게 만났다. 그때마다 당신은 내게 왠지 고맙다고 말했고, 나는 당신에게 가여움을 느꼈다.
내게 당신과의 만남은,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어쩌면 내 여정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 그 자체가 나의, 그리고 당신의 여정이었다. 나는 내가 머물던 당신의 집 부엌에서 둘이 세계 수도 맞히기 게임을 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우린 살면서 한 번도 대적한 적 없는 상대를 서로 만났더랬다. 그 어떤 게임이 이리도 흥미진진할 수 있을까. 당신이 모든 짐을 가지고 세상을 몇 년 단위로 옮겨 다니며 사는 모습에서, 나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보았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끔 느끼곤 하는 종류의 애잔함을 타인에게서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해보지 못했더랬다.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씩씩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세상의 외진 곳들로 향하는 것도, 세상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주제도 신기하리만치 닮아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온갖 음악을 들려주었고, 나는 당신에게 온갖 영화를 보여주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시선과 움직임이, 짜여진 퍼즐처럼 놀라우리만치 서로에게 맞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과 연락을 안 한 지가 오래되었다. 사실 당신을 떠올리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다 어제 우연히 어떤 감정이 내 마음을 스치다 당신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나는 문득, 우리가 앞으로 살면서 어디서든, 얼만큼이든, 종종 스치며 웃음과 추억을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걸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