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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어둠을 토해낸다

by 엘샤랄라

"한낮 빛이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프리드리히 니체



'자기 계발서 self-help books'를 좋아한다.


나 자신이 조금 흐트러지고 느슨해졌다 싶을 때, 혹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식보다 조금 더 나은 방식을 찾고자 할 때 자기 계발서를 찾는다. '이 정도면 됐지'하는 안이한 생각이 들 때면, 책을 통해 한 번 더 나 자신을 조이는 계기로 삼는다. 책을 읽기 시작함과 동시에 하나라도 실천해보고 싶어서 몸이 들썩거린다. 도파민이 서서히 끌어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성공 신화'를 알려준 대로만 실천한다면 나 또한 빠른 시간 안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몇 번 해보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내가 책에 속은 건가, 책이 나를 속인 건가.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현재를 사는 나, 과거의 나를 완전히 해체함으로 새로워지는 나, 지금보다 10배 더 큰 생각을 통해 사고의 확장이 곧 사업의 확장이 될 수 있도록 해내는 나, 고작 몇백 시간이 아닌 몇만 시간의 꾸준한 연습으로 일정 경지에 이르는 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해내는 힘을 기르는 나, 책 속에서 새롭게 만나는 나는 황홀하다. 그 황홀한 빛이 나를 홀린다. 그 눈부신 빛을 보고 달려가다 상대적으로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주변을 보지 못한다.


나도 해봤지만 안된다며 좌절할 수 있다. 패배의식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내가 똑같지 않고, 나 또한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읽는 순간 책을 통해 전해지는 투지는 일시적이나, 그 좋은 특성들을 나에게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비교적 긴 시간의 노력과 추적이 필요하다. 당장 이뤄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만 그들의 탁월한 기술을 내 역량만큼 조금씩 훔친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대로 서서히 나 자신을 성장시켜 본다.


'자기 계발서'류의 책이 빛이라면, 여타 문학장르는 어둠이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처음 읽었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글의 제목만으로 이야기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나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일깨워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 온몸에 전해지는 전율과 그 타격이 남긴 후유증으로 책을 통한 나의 생각을 정립하는 데에 시간이 꽤나 필요했다. 책이 전하는 어둠의 깊이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 들춰 봐도 알 수 없는 그 공간에 잠시 발을 담갔지만, 온전히 알아내기에는 용기와 이해력이 부족하다. 호기심이 이는 그곳에 불쑥 미지의 손을 쑤욱 들이밀어봤다. 밀고 들어온 손은 어쩔 줄 몰라하며 잡히는 대로 오므린 손에 무언가를 담아 퍼 나른다. 그렇게 어둠은 어둠을 토해낸다.


강렬한 꿈으로 인하여 너무도 평범한 삶을 살아온 영혜는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게 된다. 너무도 평범하고 수수하다는 이유로 영혜를 골랐던 남편은 영혜의 극단적 채식주의로 인하여 이젠 영혜가 낯설게만 느껴지는데, 비단 그 낯섦은 남편뿐만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어떻게 해서든 영혜의 가족이라는 인물들은 영혜의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바꿔 보려 애를 쓰지만, 그 모습이 나는 너무도 폭력적으로 보인다. 사랑과 애정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그 폭력은 억지로 고기를 꾸역꾸역 영혜의 입에 처넣으려는 그들의 행위로 절정에 다다른다.


혹여나 우리의 인생에서도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행되는 폭력들이 있는지 나를, 주변을, 사회를 둘러본다.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하다 여겼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본다. 그저 영혜의 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지켜봐 주고, 기다려 줄 수는 없는 건지. 그러한 시도는 정말 불가능한 건지. 왜 그들은 영혜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고 묵살해 버리는지. 이 사회에서 묵살되는 수많은 목소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간이 허락된다.


책에 대한 나의 이해는 아직 미완성이다. 어둠이 허락한 질문들에 나는 아직도 답을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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