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④ : 펜디(1925)
모피판매금지법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피 판매 금지. 전세계적으로 Fur-Free 확산 중이죠. 21년에는 케어링 그룹(산하 브랜드 : 구찌와 입생로랑, 보테가 베네타 등)이 모피 사용 중단을 선언했죠. 케링 그룹 외에도 프라다 그룹과 샤넬, 버버리도 오래 전 모피 사용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펜디를 소유한 LVMH에서는 마냥 Fur-Free를 외칠 수 없습니다. 모피와 가죽으로 독보적인 기술과 상품을 보유하고 있는데 마냥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죠. 그렇기에 케링그룹만큼 모피 사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할 순 없는 상황입니다. 대신 차선책으로 LVMH와 펜디는 합성 모피섬유 개발이라는 해결책을 내세우고 있죠. Fur로 흥했던 펜디의 과거와, Fur-Free에 맞닥뜨린 펜디의 미래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펜디는 4대째 여성들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펜디라는 이름의 유래는,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18년 로마에 가죽 전문점을 오픈한 아델레 카사그란데는 1925년 에두아르도 펜디와 결혼하죠. 이후 아델레 펜디가 된 그녀는 남편의 성 "Fendi"라는 이름으로 브랜드를 런칭합니다.
여성이 이끄는 기업임에도, 남편의 성을 따랐다는 점에선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20년 전후의 이탈리아와 유럽은,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이 두꺼웠습니다. 때문에 창립자 아델레는 사업을 위해서는 본인의 이름이나 성보다 남편의 성을 쓰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녀의 디자인 감각과 모피 및 가죽을 다루는 센스 덕분에 펜디의 사업 규모는 지속적으로 커져갔습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직후 공산품보다 희소성 있는 상품을 선호하던 부자들이 펜디의 고급스러운 모피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모피는 남성보다 여성들에 적합한 상품이니,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죠.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가 패전국이 되면서 펜디도 주춤하게 됩니다.
1946년, 아델 펜디는 그녀의 다섯 딸들에게 (파올라-안나-프랑카-칼라-아이다) 펜디 가업 승계를 해주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남아있었음에도, 2대 딸들의 분업과 협업으로 펜디는 모피 명품으로써 포지션을 다시 견고히 쌓아갔습니다.
1965년, 여성주도적 브랜드인 펜디에 첫 남성이 영입됩니다. 바로 샤넬을 되살린 "칼 라거펠트"죠. 그는 1965년부터 사망한 2019년까지 54년간 펜디의 디자이너로 활약합니다. (동시에, 1974년부터 끌로에 수석 디자이너, 1983년부터는 샤넬 디자이너, 1984년 본인의 이름을 딴 칼 라거펠트의 론칭까지 담당하며 많은 브랜드들 동시에 이끌어 나가죠.)
그가 펜디에서 이루어 낸 업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트렌디한 Fur"입니다. 1920년대야 모피가 희소성이 높았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 희소성이 줄었죠. 거기다 치렁치렁하고 무거워 올드한 이미지를 풍기기도 했죠. 그래서 그는 모피의 크기와 부피는 줄이고 색을 입히며,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변모시킵니다. 또한 다람쥐, 토끼 털 등 기존에 사용하지 않던 원단도 사용했죠. (모피는 밍크와 담비 털이 고급 원재료입니다.)
두 번째는 "Dobule F" 로고입니다. Fun-Fur를 의미하는 로고로, 펜디의 상징입니다. 1965년 칼 라거펠트가 이 로고를 고안안 후 지금까지도 가방을 포함해 넓은 범주에서 활용되고 있죠. 1997년에는 기성복(RTW)라인과 1984년 악세사리 라인(선글라스, 넥타이 등)을 런칭했는데, 여기서도 해당 로고가 자주 사용되었답니다.
지금의 펜디를 이끌고 있는 3명입니다. 왼쪽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부터, 가운데 킴 존스와 우측의 델피나 델레트레즈 펜디가 각 펜디의 사업 영역을 어떻게 확장했는지 알아봅시다.
창업주의 손녀, 3대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는 지금의 펜디를 이끌고 있습니다. 2019년 칼 라거 펠트는 사망하기 전까지 펜디의 여성복을 담당했고, 실비아는 남성복과 가방을 맡았죠. 이떄 그녀는 1997년에 "바게트 백" 2009년 "피카부 백"이라는 펜디의 상징적 가방을 만들어냅니다. (지금은 스테디 셀러로 자리 잡았죠.)
바게트 백 : 프랑스인들이 어깨 밑에 바게트를 끼고 다니듯, 어깨 밑에 가볍게 낄 수 있도록 고안한 백
피카부 백 : 피카부는 "까꿍"이라는 영어단어로, 외피를 뒤집으면 안감이 보이는 특이한 쉐잎
바게트 백은 "최소한의 부피", "최소한의 무게"을 지향하며, 실용성을 추구합니다. 동시에 "섹스앤더시티" 협찬으로 더욱 유명해졌죠. 여태껏 400개가 넘는 바게트 백 모델이 출시되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수준입니다. 이어서 2005년 스파이백과 2009년 피카부 백을 출시함으로써, 펜디는 모피 브랜드가 아닌 명품 브랜드로써 거듭나게 됩니다.
펜디의 두 번째 남자 디자이너, 킴존스입니다. 알프레드 던힐을 시작으로 2011년 루이비통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그는 2019년부터 디올을, 2021년부터 펜디에서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죠. (현재 디올에서는 남성복, 펜디에서는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동시에" 활약하고 있습니다.)
명품의 스트릿화를 주도한 4명의 인물이 있죠. 뎀나 바질리아(발렌시아가), 알레산드로 미켈레(구찌), 리카르도 티시(버버리), 그리고 킴 존스(디올)입니다. 그는 루이비통에서 활동했던 17 년도, 이미 명품의 스트릿화를 이룬 적이 있습니다. 바로 루이비통x슈프림의 콜라보레이션이죠. 또한 2020년 디올x스투시, 2021년 디올 오블리크x에어조던 콜라보를 진행하며 다시금 럭셔리와 스트릿의 환상적인 콜라보를 이루어 냅니다. 오블리크x조던의 경우 발매가가 하이(300만원), 로우(270만원)이었는데 리셀가는 천 만원이 넘는답니다. (루이비통x슈프림 또한 가격을 떠나, 재고가 없어서 구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합니다.)
킴 존스가 명품의 스트릿을 주도했지만, 단 하나의 원칙은 고수했습니다.
"브랜드 시그니처를 훼손하지 않는다."
루이비통x슈프림에서도 루이비통의 모노그램과 슈프림의 박스로고는 그대로 둔 채 콜라보를 진행했으며, 디올x에어조던 또한 디올의 오블리크 패턴(1967년 제작)과 조던의 디자인을 훼손하지 않고 콜라보를 진행했습니다. 즉, 그는 디자이너의 색깔보다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더욱 우선시한 것이죠.
그런 킴 존스이기에, 펜디 여성복에서도 기존의 헤리티지를 유지해나갑니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브랜드인가 헤리티지인만큼 "여성이 평상시 입기 편한 옷" , "여성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듭니다. 또한 기존의 헤리티지였던 퍼와 모피, 더블 F로고도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죠. (현재 새로운 더블F로고를 동시에 사용 중입니다.) 물론 본인만의 색채와 디테일을 잘 녹여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스트릿 브랜드들과 협업같은 파격적인 행보를 추구하기보다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업주의 증손녀, 실비아 벤투리니의 딸인 델피나 델레트레즈 펜디는 현재 펜디에서 쥬얼리 디자인을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때 본인의 이름은 내건 "델피나 델레트레즈"라는 악세사리 브랜드를 10년 넘게 잘 운영하고 있답니다. 그 경험을 활용해 그녀는 21년부터 펜디에서 "오'락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덕에 요즘 펜디 런웨이에서는 악세사리&쥬얼리가 가미된 룩들이 자주 보이죠.
22년, LVMH와 펜디는 영국 학계와 산학 협력을 구축하고 합성 모피섬유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21년 케링그룹이 모피 사용 중단을 선언한지 약 1년이 지난 시점이죠. 모피판매금지법 확산에 LVMH와 펜디 또한 살아남기 위한 절충안을 내놓은 셈이죠.
다만 당장 모피 사용의 100% 중단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21년,22년 킴존스의 F/W 컬렉션까지 모피 제품이 출시되기도 했고 (물론 과거 대비 적은 비중) 개발 연구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 때문이죠. 모피를 상징으로 여기던 펜디에서 그 비중이 줄고, 합성 모피섬유를 개발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칼 라거펠트 시절에도 모피 사용 이슈는 있었지만, 그때도 펜디는 답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킴 존스를 비롯한 3인 체제로 그 답을 찾아가고 있죠. 그렇기에 모피가 대체 또는 사용 불가에 이르더라도 펜디는 답을 찾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