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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사랑을 말해요

몸의 언어

by 김태호

저는 애정 표현이 서툰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무드에 둔하고 애교도 적은 편이지요.


그렇다고 말수가 적은 건 아닙니다.

까르르 잘 웃고 타인의 행언에 대한 반응도

굉장히 풍성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아내의 '잠깐만'은

말처럼 짧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과

잠깐 안부를 나눈다며 저를 십 분, 이십 분

세워 놓은 날도 많으니까요.


예전에는 그런 기다림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하며

"나 먼저 차에 가 있을게." 합니다.


정치 유튜브나

블로그 답글을 확인하고 있으면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고 옆에 탑니다.


방금 만난 사람의 소소한 소식이나

에피소드를 또 조잘조잘 이르듯 하다가

곧 잠에 들기도 해요.


처음에는 그런 아내가 살짝 불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너무 많이

빼앗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가만히 살펴보니

아내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조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저 만남이 좋고 사람과 나누는

시간과 공간이 좋은 거예요.


감사한 일은 그런 아내가

제 곁이 머무르고 밥을 먹고 앉고 눕고

보이지 않는 줄에 연결된 것처럼

늘 곁에 머무르기를 즐긴다는 사실입니다.


20년, 질릴 만도 한 세월이지만

밤에 라면 하나를 먹어도

제가 젓가락을 놓을 때까지 곁에 앉아

진한 국물을 홀짝입니다.

해질 무렵 텃밭에 서면

모기가 많으니 들어가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호박잎을 따거나

농사에 대해 주워들은 지식을 논하며

'내년에는 케일을 심어보자.'

'겨울에도 쌈 채소를 먹게 해 달라'는 등

막무가내 주장을 펼칩니다.


한 여름 들러붙는 아이들을 덥다고 밀어내면서

자신의 다리를 제 옆구리에 턱 올려놓습니다.


지금도 내 팔과 어깨를 스치며

양푼이에 담긴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아내가 몸으로 사랑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와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며

아내 사용 설명서를 가슴속에 만들어 가고 있다.

오해와 선입견으로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해

너덜너덜해진 설명서를 조금씩 완성해 간다.

-새피엔딩(사람 사용 설명서) 중에서


#몸 #사랑 #아내 #만남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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