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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Nov 01. 2020

집에 다 와서 떨어뜨린 계란 한판

내 속도대로 일을 한다는 것은

'어 벌써 5시네. 남편이 조금 늦는다고 했으니 집 앞 마트에 들렀다가 들어가면 시간이 딱 맞겠어. 가만 내가 나올 때 국냄비를 냉장고에 넣었더라 안 넣었더라...'


블로그를 운영하며 각자의 브랜드를 운영하는 블로그 이웃들 모임에 다녀온 길이었다. 동종업계 네트워킹이라고도   있겠다. 대부분 혼자 일을 하기 때문에 만나서 회포도 풀고 서로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는 시간이 소중하다. 문제는 기분이 너무 좋아 선을 었다는 . 귀가가 늦어도 뭐라  사람은 없었지만 하루 중에   저녁만큼은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싶었기에 벌써 어둑어둑해진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채소는 있는 것 같고, 요즘 계란을 잘 안 먹었네. 남편도 린아도 내가 한 계란찜을 좋아하니까 그래, 계란 한 판 사가야겠다'


낮에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간 파스타를 먹었으니 저녁엔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재료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으려고 한다. 보통보다 살짝 더 주고 사면 불안함은 없달까. 계란도 마찬가지였다. 집 근처그 마트에서만 무항생제 계란을 팔고 있었다. 마트에 들러계란 한판을 사서 약간 언덕에 있는 우리 아파트에 오르는데 숨이 헉헉 찼다. 낮에 목청 높여 떠들고 많이 웃어서인가? 다음번 기획 회의에 너무 몰두해서 그런가? 유난히 다리도 떨리는 듯했다. 아무렴 어때, 내 좋아서 하는 일인 걸. 그런 생각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막 출발하려는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 집 앞에 내리는데, 숨은 점점 목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 힘마저 풀리는 듯 했다 '털썩'.


나는 계란을 문 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것도 30여 개나 되는 계란 한 판을.


터진 계란에서 나온 계란물이 현관  복도에 기름을 부은것처럼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정상이라면 얼른 문을 열어 가방을 던진  휴지나 걸레, 행주나 물티슈  무엇이라도 얼른 는게 맞았다. 나는 그저 굳은 얼굴로 서서히 퍼지는 계란물을 보고만 서있었다.


"당신 뭐해?"

", 당신 왔어. 내가 .. 계란을 떨어 뜨렸어. 내가 오늘 계란찜을 해주려고 했거든. 당신 알지? 내가 계란찜 잘하는 계란찜은 파가  들어가야 그리고 육수를 내서..."


나는 횡설수설 하규 있었다. 남편은 나를 들어가 있으라고 하더니 어느새 두루마리 휴지를 가지고 나와 바닥에 묻은 계란물을 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가방을 거실로 던져두고 남편과 함께 현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회사는 특채로 졸업  조기 취업된 곳이었다. 대학 다닐  여러 공모전에 수상하며 공모전을 주최한 회사 담당자로부터 관심을 받기도 했는데 그중 나를 눈여겨본 h그룹의 본부장이 정식으로 취업 의사를 물어왔다. IMF 세대로 다들 취업이 힘든 때라 어떤 회사에서 나를 불러준다는  사실만으로 흥분해 있었다. 졸업을  학기 미루고 어학연수를 가거나 교환 학생을 선택한  동기들도 많았다. 나는 그럴 여유없었지만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희망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광고대행사 일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침마다 토스트 냄새가 감도는 감각적인 사무실. 전략적 마인드와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이 공존하며 제각각 아우라를 뿜어내는 그런 곳이었다. 나도 만만치 않았다. 어떨 때는 전략가로 어떨 때는 카피라이터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 기여했다. 한가지 큰 문제는 자정 전에 퇴근할 수 없는 회사 시스템이었다. 퇴근 시간께가 되면 팀장이나 부장님이 파티션 너머로 '거 저녁 먹고들 합시다!'라고 바람(?)을 잡는다. 그러면 차장급들이 대리급들을 향해 '얘들아 오늘 저녁은 뭘 먹으면 좋을까?"라고 양복 재킷을 입으며 나갈 채비를 한다. 그중 똘똘한 대리 하나가 엑셀로 작성해둔 삼성역 근처 맛집 리스트를 살피며 '오늘은 김치찌개에 명란 계란말이 나오는 그 전집 어때요?'라고 맞장구를 치면 우리는 그 집으로 김치찌개와 전을 먹으러 가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다니다 보니, 로망이 하나 생겼다. '다음 화사는 필히 자정 전 퇴근하는 회사'그 밖에 것들은 좋았다. 견딜만했다. 그 시기를 지날 때 지금 남편을 만났다. 전화가 와서 일 잘하고 있는지를 물으면 나는 알 수 없는 어지러움증에 멀리는 못 가고 같은 건물에 있는 00내과에서 링거를 맞고 있다고 가끔 이야길 하면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결혼하면 다른 직장으로 옮기라고 제법 힘주어서 말하기도 했다.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고 한 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는데 나는 그때 10시 출근에 칼 7시 퇴근인 회사로 이직했다.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의 반열에 오른 IT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다. 이직하고 한동안은 잘 다녔지만 나는 또 야근을 자처했다. 습관이 되어버려서인지 좀처럼 하던 일을 끊고 퇴근하지 못했다. 어린 아이가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모님도 이제 그만 퇴근할 시간인데 나는 미련하게 다음날 발표할 ppt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하고 갈게’ 어쩌면 야근은 회사가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한 것인지도 몰랐다.


퇴사하고 이 작은 상점을 운영하면서 그럼 야근 없는 날들이었나 하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식구 중 누구 하나 입맛 까다로운 사람 없고 그날도 누구 하나 계란찜을 먹고 싶다고 이야기한 사람 없었지만 기어이 계란 한 판을 사 오다가 그 사달이 난 것처럼 나는 내 페이스대로 워라벨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원하는 만큼 일하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또 그러지 못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성과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매출이 떨어지면 '뭐가 문제일까?' 하는 마음부터 들었다. 그해 메인 제품 거래처가 도통 어딘지 모르겠으면 그것을 찾느라 뜬눈으로 며칠 밤을 새우곤 했다. 남들에게는 관대하면서 왜 나에게만 그렇게 혹독 해지는 것인지, 누구보다 일과 일상의 균형을 원했으면서도 가만 놔두면 점점 그 길에서 멀어지곤 했다.


"내가 밥 준비할게. 린이   시간이니까 당신은  누워있던지 

"띠리띠리 띠리링~ 엄마!"


문을 열고 아이가 내품으로 뛰어 들어온다. 9살의 아이는 아이다운 에너지가 넘친다. 추웠는지 살짝 발그레해진 통통한 볼이 귀엽기만 하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니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가족들과의 시간에도 충실하기 위해, 아이가 나를 기다리지 않는 일상을 위해 ' ',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길을 택했는데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작은 상점은 나 혼자서 운영한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든든한 조력자와 함께 운영하는 기분이 든다. 집 앞에 다 와놓고서 계란 한 판을 떨어뜨렸을 때 그것을 보고 '당신은 왜 그래?'하지 않는 남편에게 아직까지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빠듯 빠듯하게 다니지 말고  여유 있게 집에 와서  주특기인 해물 다시로 육수를  부드러운 뚝배기 계란찜을 해놓고 기다려야 겠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을 해주어야겠어.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 뭐가 그렇단 말이야?’라고 말하겠지만 ‘당신 없이는  작아도  일이 너무 많은  상점을 운영해오긴 어려웠을 거라고 말은 마음속으로만 하게 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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