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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May 28. 2023

나는 깨끗한 히키코모리였다

우울을 건너는 방법을 배우다

 


  결혼하고 석 달만에 엄마가 농약을 마셨다. 지금은 판매조차 금지된 악명 높은 제초제.  치사율이 99.9퍼센트이지만 당시 시골에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평생 다툼이 끊이질 않았던 엄마와 아빠를 보며 제발 이혼하라고 화를 내보기도 달래 보기도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함께 사셨고 그날엄마는 분을 이기지 못하셨다. 말 그대로 사달이 났다.


   엄마는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 실에 이미 들어가 있었고,   동생이 모든 걸 수습하고 나에게 뒤늦게 얘기를 했다. 나는 현관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오열했다.  


   의사는 보호자  한 명을 무조건 병원에 남게 했고 빨리 신변정리를  권했다.  병원에서 그 농약에 대해 검색했고, 의사가 내게 권한 것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검색했던 모든 글엔 ' 이걸 마셨는데 어떻게 하나요 ' 라는  글만 있을 뿐 후기도  답도 없었다. 간혹 달리는 후기엔 몇 달 후 장례를 치렀다는 짧은 글만 있을 뿐.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중환자실 보호자실에서 숙식을 했다. 간혹 남편과 동생이 교대해 주었지만  오히려 집에 있는 게 더 불안하고 슬펐다. 그때 억지로라도 이혼시켰다면 이렇게 까진 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죄책감으로 괴롭기만 했다.

  


   하루 몇 번 안 되는 면회시간에 나는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다. 엄마도 나도 너무 울기만 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로를 보는게 너무 괴롭게 느껴져서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게 나을것 같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는데 엄마는 위중해지기는 커녕 나빠지지도 않았다. 의사는 이상하다며  마신병을 가져오라고 해서,  동생은 농장에서 병을 찾아 갖다 주기도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엄마는 그렇게 퇴원을 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다음날부터 나는 엄마의 병원 정기진료를 모시고 다녔고 오가는 차 안에서 정신과를 다녀보는 게 어떠냐고 설득을 했다. 매일 집에 가서 같이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고 시답지 않은 얘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왔다.  동생과 나는 번갈아가며 엄마 곁에 있었고  그건 다시 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가 섞인 감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몇 달이 지나가고 다들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새 일자리를 찾았고 나름 적응하고 있는 듯했지만, 마음속에 균열이 생겼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어느 다름없는 평범한  출근길에, 만약 내가 차로 사고를 내면 어떨까 하는 심한 자살충동을 느꼈다. 너무 놀랐다. 이렇게 일도 잘되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잠시 우울한 거겠지 하며 지나가는 생각이겠지 했지만 그런 생각은 점점 심해져 갔고 한 달쯤 후,  모든 전화를 거부하고  암막 커튼을 치고는 집을 나가지 않았다. 미세하게 시작되었던 균열로 내 마음이 와장창 부서져 버렸다. 어떤 행사도 참석하지 않았고 어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계속 울려대던 전화도 남편을  통해 들려오던 걱정들도 몇 달이 지나니 잠잠해졌다.


  그렇게 나는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잠만 잔다고 하고 누군가는 쓰레기를 쌓아둔다고 하고 씻지도 않는다고 했다. 대걔가 생활이 무너진다고 했는데, 희한하게 나는 전혀 그렇질 않았다.


    남편이 출근을 하면 그때부터 일어나서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다. 청소를 정말 열심히 했다. 그다지 깨끗한 성격도 아니었지만 일하러 다니는 남편에게 폐를 끼치긴 싫었다. 밥과 음식 몇 가지를 하고 열한 시쯤 밥과 술을 마시며 미드나 일드를 봤다.  술은  퇴근할 즈음엔 대충 다 깬 상태가 돼서 남편은 내가 술을 마시는지도 몰랐다. 퇴근하고 온 남편에게 밥을 차려주고 내일 아침 먹을 밥을 차려놓고는 잠이 들었다.  쓰레기를 내어놓는 일이나 장을 보는 것 같은 바깥일들만 남편손을 빌렸고 그 외 모든 일들은 내가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갔다. 그냥 그냥, 그렇게 그렇게 하루가 반복적인 패턴으로 지나갔다. 그동안  평생 맺어졌던 모든 인간관계는 끊어졌고,  커리어도 거기서 멈췄다.


   어느 날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으로  죄책감이 들었고 어느 날은 한없이 우울한 날도 있었다. 별 감정 없이 그냥 휴일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이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내 감정만을 우선으로 두고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 (지금까지도 아무 말 않고 묵묵히 지켜봐 준 남편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집안 모든 커튼을 걷고 햇살을 집안에 들였다.  마치 매일을 그래 온 것처럼. 드디어 우울이 바닥을 친 것이다. 그날부터 점점 커튼을 걷어놓는 시간이 늘어나고 어느 날은 쓰레기를 버리러 집 앞으로 나갔다.  며칠 후엔 마트도 가고 어느 날 밤은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했다.


   어느 유튜브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잃고 계속 울다 보니 어느 날은 웃음이 나더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얘길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커튼을 활짝 걷고 눈부신 햇살을 보았던 날이 기억났다. 엄마의 그날 이후,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울면 약해져서 안된다 라는 생각으로. 그런 내가 집 안에서 보낸 기간들은 내가 울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계속 바닥으로 내려가기만 하는 것 같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바닥을 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있는 힘껏 바닥을 치고 올라오면 된다.


    이후 나는 우울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고,  십 년 후 아주 큰 우울이 왔을 때도 주저 없이 병원에 가서 상담도 받고 약도 먹었으며,  시에서 하는 마음 상담 같은 프로 그램도 적극적으로 받으면서 살고 있다.


    이제는 우울함이나 괴로움 등 나쁜 감정이 들면 바닥까지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고, 채찍질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휴식도 주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가면서 다시 올라가려고 용을 쓴다. 어떤 식으로든지 뭔가를 하다 보면 다시 올라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느때엔 금방 되기도 하고, 어느때엔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된다라는 걸 알고 있으니 조급해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된다. 꼭 된다. 그것만이 내가 아는 사실이다.






   엄마는 몇 년 후 일을 다니시기 시작하셨고 그렇게 버신 돈으로 아이에게 용돈을 주시기도 하시고 맛있는 것을 사주시기도 하신다. 나는 일부러 계산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번 돈으로 자식에게 쓴다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  나 역시도  그 이후로 여행을 다니고 크게 웃고 때로는 살을 빼야지 하는 자잘한(?) 고민들을 하며 평범하게 지냈다.   


  누군가 지금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지나간다고, 언젠가는 지나간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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