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더하기 그리고 빼기

조화로움이 빚어낸 결과물

by 에밀리H

향수 하나를 만들기 위해 많은 향료들이 조합된다.


물론 모든 향수들이 그런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장미'라는 한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향수를 만들더라도 생각보다 수많은 향료들을 알맞게 조합해야 한다.


내가 조향 공부를 하면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우와'


였다.


향수를 살 때 TOP, MIDDLE, LAST 노트에 적혀있는 향료들을 모두 맡아봤냐는 말과 함께.


그러나 모든 향료들이 향기롭지만은 않다.


누구나 맡아도 좋아할 법한 향료가 있는 반면에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지방 취도 있고, 동물원에서 많이 맡아봤을 법한 찌린내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나는 모든 향은 버릴 게 없다.


속이 니글거리는 지방 취와 다른 향들을 적절하게 조합하면 발향이 잘 되게 만들어 주고, 애니멀릭 한 향료들은 꽃향을 더욱 깊이 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색의 조합과 마찬가지로 조향도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썩 마음에 드는 향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처음 단일 향료에 대해서 배울 때 모든 향이 맡기 편안한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것이 천연향료이고 평소 좋아하는 부류의 향이라 할지라도 계속 맡으면 머리가 아프다. 이향 저향 맡으면서 코가 둔해지는 것과는 다른 개념으로 좋은 게 다가 아니었다. 향은 호불호와 관계없이 계속 맡으면 머리가 두통이 생길 수 있다. 그래도 다양한 향료를 맡아 버릇하면서 향료를 구분할 줄 알게 되면 신기하리만큼 이해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어 간다.


그다음으로는 좋아하는 향료만 조합한다고 해서 풍성하면서도 무게감을 더해주는 향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향의 깊이는 애니멀릭 한 향을 터치했을 때 더욱 깊어질 때가 있으며, 라스트 노트에 해당되는 묵직한 향료들의 균형이 잘 잡히면 그만큼 향의 지속성을 늘릴 수 있게 된다. 나는 구르망 계열의 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르망 계열의 대표적인 향료인 바닐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기준에서 바닐라를 생각했을 때 지나치게 달달한 그 무언가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오리엔탈 향을 표현할 때는 더없이 좋은 향료였고 헤비 플로럴 향과 적절하게 만났을 때는 분위기 있는 밤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줬다. 뭔가 포근한 느낌을 더해줄 때가 있었고 날카롭게 조합된 향들을 부드럽게 라운딩 해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내 취향에만 기대어 편애하기보다 다양한 향료를 접해보고 깊이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지려 노력했다.


마지막으로는 비워내는 것을 배웠다.


최적의 비율로 만들어진 향은 맡으면 맡을수록 뿌듯하고 그 재미는 꽤나 중독적이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조향사들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그려지는 향의 비율을 찾아내기 위해 몇 백번의 실패와 몇 년의 기다림을 감내한다.


내가 좋아하는 단일 향료가 생기면 순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평소에 좋아하는 향료들을 때려 붓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의외의 창조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아마추어인 나에게는 주제가 산으로 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과유불급.


아무리 조합이 좋을 거 같더라도 꼭 필요한 향료가 아니면 포뮬러에서 비워내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위와 같이 향을 조합하는 과정을 배우면서 나로부터 비롯되는 슬픔에 대한 태도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었다. 엄청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olfaction(후각) 연습을 하면서 단일 향이 주는 깊이에 대해 알고자 노력하는 자세를 가졌고, 처음 받은 인상과 전혀 다른 잔향으로 다른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그리고 향을 맡으면서 나의 기억과 연관을 시키면서 내가 슬퍼한 시간 이상으로 좋았던 추억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만큼 단일 향료든 향수든 후각 연습을 하고 있을 때면 행복한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도록 해줬다.


나는 평소에 감정에 대한 균형을 잃었다고 생각이 들면 현재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향수를 꺼내 맡거나, 옷에 뿌린다. 분명 화장 하나 하지 않은 맨 얼굴에 후줄근한 홈웨어를 입고 있지만 잠시나마 향수가 전달하는 메시지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준다. 같은 맥락으로 꽃차를 마시기도 하고 진한 향이 나는 그 무언가를 통해서 뇌를 환기시킨다. 그래서 잠깐 동안 심취해있던 하나의 감정에서 벗어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 준다.


향수는 하나의 완성품으로 나오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몇 백번의 시도 끝에 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향이 나올까 말까 하는 게 향수다. 아주 소량의 향료로 전체의 향을 바꿔버릴 수 있으며, 많은 양의 특정 향료를 넣어도 가려지지 않는 향 또한 존재한다. 그때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결국 개별 향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기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욱이 균형을 지키는 법을 알게 된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감정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쁜 일만 기억한다고 해서 삶이 더욱 윤택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 이상으로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반면에 슬픈 기억만 떠올린다고 해서 계속 우울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바닥을 치고 일어나 새로운 약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적절한 더하기와 빼기를 통해 균형을 잡아야만 한다.


나의 슬픔을 어떠한 매개체를 통해서 전환할 수 있다는 엄청난 기회이자 축복이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과 다정한 포옹을 바라지 않더라도 단 몇 방울을 몸에 장착해서 자유롭게 감정을 덜어낼 수 있게 해 줬고, 적절한 조합을 찾아가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슬픔이라는 감정 하나에만 집중하면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크고 금방 지치게 만들지만 다른 감정의 분위기로 전환하면 슬픔을 객관화하여 더할 건 더하고 뺄 건 빼게 만들어 준다.


나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보니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 보였고, 그러면서 함께 공감하고 조금은 덜어낼 수 있도록 향을 소개해줬다. 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수를 맡으면서 보여주는 표정이 너무 좋았고 덩달아 힐링이 됐다. 그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감정의 균형을 잡기 위해 더하기와 빼기를 하고 있었다.


혹시 선물은 받았지만 향이 너무 세서 사용하지 않는 향수를 가지고 있다면 공병에 에탄올을 섞어서 디퓨저로 사용하거나 아무 냄새도 배어있지 않은 두꺼운 종이에 살짝 뿌려놓고 20-30분 뒤에 한번, 그리고 1시간 뒤에 맡아보시길. 그때만 맡아지는 향의 매력을 알게 되는 순간 이전 취향과 전혀 다른 향수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호옥시나 해서.... 얘기하지만 나는 퍼퓸 디자이너 민간 자격증이 있을 뿐 향수 판매원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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