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상할 게 없는 나이

누구는 빠르고 누구는 느리고

by 에밀리H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반복되고, 점차 인간이 늙어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인생을 떠나는데 순서 없듯이 개인의 인생에도 정해진 순서 없이 흘러간다.


공부할 나이, 대학 갈 나이, 결혼할 나이, 출산할 나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정해놓은 인생의 순서가 있다. 나름 적당한 시기에 정해놓은 순서대로 경험해나가면 보통의 삶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보편적으로 정해놓은 인생의 순서는 모두에게 정답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된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정해진 삶의 순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데, 그렇게 해야 남들에게 구태여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처럼 서른의 나이를 넘어가면 결혼과 출산 소식을 듣는 것만큼이나 부고를 듣게 된다. 이전에는 서로의 안부만 묻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부모님을 포함한 다른 가족의 안부까지 물어봐야 마음이 편해지는 나이가 됐다. 이전에는 조부모님 부고가 많았다면 이제는 주변 사람들의 부모님, 친척 어르신, 심지어 친구들까지. 급작스런 비보에 슬픔에 잠기는 일이 많아진다.


예전에는 무슨 일로 이별을 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경험이 쌓인 지금은 깊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럴 때가 됐구나 싶어서 상황에 대한 이유를 묻기보다 위로의 말만 건네거나 한 번 꼭 안아주게 된다. 이제는 이런 소식을 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돼버렸다.


이전보다 더 많이 슬픔 속으로 깊게 빠져드는 일이 반복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슬픈 감정이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매번 가슴 철렁거리는 소식을 들을 때면 마음의 거리 두기를 실패한 나의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적 동요에 당위성을 부여해서 설명하려 할 때 제일 처음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때는 내가 재수를 할 때였다.


꼴에 공부에만 집중을 하겠다고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수능일이 다가올수록 부담스러운 응원 연락을 받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꺼두는 일이 더욱 많아졌고, 전화가 오더라도 씹고 문자가 와도 답장을 안 했다.


10월 말 어느 날. 그날은 유난히도 친구들에게 전화나 문자가 많이 왔다. 내가 일부러 연락을 끊고 있다는 걸 아는 친구들이 말이다. 뜬금없이 친구들 사이에서 내 이야기가 나왔나 싶기도 했고 이 중요한 시기에 왜 연락을 하나 싶었다. 그렇게 아주 잠깐 기분이 상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아예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렇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를 마칠 때쯤, 무엇에 크게 놀란 언니가 내 방으로 급하게 들어와 다짜고짜 알고 있냐고 물었다.


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친구들이 공부한다고 핸드폰을 꺼둔 나에게 연락을 한 거였다. 언니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언니 친구 동생이 나와도 친구사이였기 때문에, 나는 친구의 부고를 흘러 흘러 듣게 된 거였다.


소문이 와전돼서 언니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나마 꾸준하게 연락을 하고 있던 친구에게 확인차 물어봤다.


친구가 별다른 설명 없이 다음날이 오전에 발인이니까 시간 되면 오라고 말했다.


언니가 전해 들은 소식은 사실이었다.


허탈했다.


그저 내 목표에만 집중하겠다고 그동안 친구들과 연락까지 끊어가면서 공부했나. 한 번에 대학을 붙지 못한 대가는 재수가 아닌 친구와의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이런 나의 처지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음날 문제집들과 필통 넣은 가방을 드는 대신 몇 가지 소품을 넣은 가방을 들고 일찍이 집을 나섰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다른 친구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눈 다음 친구의 영정사진을 보고 기도를 올렸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여러 번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거의 마지막 문상객이나 다름없었다. 친구 어머니는 수능 얼마 안 남았는데 와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이번에는 잘 될 거라는 응원의 말도 잊지 않고 해 주셨다.


사실 소식을 들었던 전날부터 급작스럽게 무기력함을 느꼈다. 이렇게 떠나가는 게 인생이라면 나는 뭘 바라고 살아야 할까. 이제는 더 이상 수능이 중요하지 않았다. 수능을 목전에 두고 나는 다시 한번 공부의 의미를 잃었다. 단순하게 친구와의 우정, 의리 때문이 아니었다. 엄마 때와는 또 다른 슬픔과 상실감 때문이었다.


나는 그대로 집에 가서 문제집을 들여다보더라도 눈에 안 들어올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끝까지 남아있던 친구들과 함께 화장터까지 따라갔고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줬다. 돌아오는 의전 버스 안에서 우리가 본 저녁노을과 무지개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때는 이런 슬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도 이상할 나이어서.


이로부터 꾸준하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생과 사 그리고 수많은 일들을 보고 느꼈다. 기쁠 일 보다 슬프고 두렵고 화가 날 일이 더 많은 인생은 나를 이상할 게 없는 나이로 빠르게 끌어당겼다. 이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고 불필요한 말들까지 포함해서 위로할 일이 줄어들었다.


나는 매번 인간이 정해놓은 순서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서 이를 의도적으로 어겨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의 성공을 축하해주기도 하고 슬픔을 애도하는 것 또한 우리 인생이다. 그만큼 서로가 같은 공간에서 추억을 남길 수 있음에 감사함과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또 시기와 질투, 분노 등과 같은 감정으로 슬픔을 느낄 때도 있다. 주변 또는 나의 죽음이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된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다 어떤 것이 나은 삶인지를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하지만 자각과 실천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 뜨겁게 실천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늘 어려워하는 마음만 갖고 있다.


꽃이 피고 지고, 새싹이 돋고 낙엽이 떨어지고, 해가 뜨고 달이 뜨고.


한번 태어났기 때문에 언젠가 죽을 거란 걸 아는 인생.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게 이상할 게 없는 나이에 들어서면서 마음의 주름살만 늘어가고 있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주름살이 늘어나면 결국 깊게 파인 상처처럼 남게 되려나?... 참 모르겠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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