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제자리걸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by 에밀리H

가족 또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은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완벽하게 추스를 수는 없지만 조금의 안정된 마음을 찾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한다.


겉으로는 티를 안내지만 앉으나 서나 별 의미 없는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공허한 마음을 채울 길은 없고 그저 한 곳만 응시하는 일이 많아진다.


이별은 마음을 쓰는 일이라 그런지 삶의 의욕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음이 머리를 지배하는 것이 딱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거 같았다. 그래도 슬픔을 잊어보고자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고 친구들이 하는 제안을 마다하는 일도 없었다. TV에 나오는 남의 이야기를 보면서 억지로 웃어 봤지만 크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고, 종교적 신념으로 슬픔을 눌러보려 했지만 이유 모를 눈물만이 눈앞을 가릴 뿐이었다. 더욱이 누군가 위로를 목적으로 건네는 말 조차도 귓바퀴에 머물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엄마가 바람이 되어 주변에 머물러 있다면 웃는 내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밤하늘을 비추는 별이 되어 우리 가족을 바라봤을 때 안심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일까.


하루 종일 엄마가 아프기 전에 좀 더 일찍 병을 알아차려야 했다며 자책도 해보고 엄마랑 충분히 해보지 못한 것들을 떠올려보면서 속으로 삭혀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이전보다 더욱더 남에게 의지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아빠가 있었지만 아빠가 내 감정까지 세세하게 신경 써줄 만큼 삶의 여유가 없었고, 언니가 있었지만 각자 나름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기댈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역량을 급격히 찌워야 했다.


하지만 그건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에 불과했다. 급격히 찌운 것은 더 깊은 상처만 남길 뿐 온전히 내 몫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렇게 알아가는 것은 엄마를 대신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얄팍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내가 했던 일에 결과가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때는 그것을 좀 더 나은 방향을 이끌고 나가기보다 그걸 누군가를 대신해서 해야만 했었다며 나를 동정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나로 인해 생긴 문제는 내가 만든 것은 맞지만 그 이면에는 물리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것들로 인한 것이었다며 분리를 하고, 판단하고, 철저하게 외면했다. 점점 더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 일을 바라보는 것이 수박 겉핥기처럼 가벼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열심히 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위안했고 더욱 불쌍히 여겼다.


누구나 각자의 슬픔이 있기 마련이고 누군가의 슬픔이나 고통을 크기를 비교해서도 안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냥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 대한 질투가 일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행복하고 평탄한 삶 가운데서 얼마나 남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생기는 기쁘고 즐거운 일에 겉으로는 축하를 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 그것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비아냥 거렸다. 진짜 최악이었다.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이 나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은 싫어하면서 나보다 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주변 지인들한테는 안됐다며 필요 이상의 위로를 했다. 그렇게 나를 향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발톱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할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감정의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엄마의 일만이 아니더라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겪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정한 애도는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자신에 차있었다. 아니었다. 오로지 나의 슬픔에만 진심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족했고 감정에 대한 사치만 부릴 줄 알았지 어떠한 방식으로 건강하게 해소를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 자신을 조금 더 소중하게 여겼더라면 애써 부정하고, 감추고, 포장하기 보다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이끌어야만 했다. 나는 슬픔에 취해 사는 것을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일에 매우 만족감을 느꼈고 착각하며 살았다. 그걸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나는 성숙된 자아를 갖춘 사람이었고 이 완벽한 모습을 겸손한 자세로 포장하면 돈은 없어도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에서 희열을 느꼈다.


엄마와 헤어졌던 초반의 순간에는 그저 엄마와의 추억을 되새기고 계속 떠올리는 일에만 집중했다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나한테만 집중했다. 내가 만든 가상의 세계에서는 엄마는 나를 일찍이 버리고 떠난 무정한 사람으로 변질되어 있었고 나는 그 생각에 더욱 고립되면서 제자리걸음 걷는 것에 적응을 해버렸다.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것들만 볼 수 있으니까 그곳이 내 감정의 유토피아였다.


내가 그동안 슬픔에 대한 감정을 누구보다 아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가공하고 방치해뒀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남모르게 많이 아팠다. 그 공백을 다시 채워 넣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잘못 만들어진 자아는 점차 하나둘씩 놓아줄 예정이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온전한 '나'의 모습을 위해 제자리걸음은 이제 멈추고 잰걸음으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연습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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