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수군거림

귓가에 들리는 여러 속삭임

by 에밀리H

대부분이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변 사람들이 몸이 아파서 슬픔을 겪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정신 건강에 대해서는 등한시했었다. 언행이 보통의 사람들과 조금 차이를 보이지 않는 이상 별 탈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랑 중학교 때까지 정신이 조금 불편해서 말을 어눌하게 하는 친구 몇 명이 있었다. 그 친구들 중에서도 몇 명은 학습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긴 했지만 우리가 조금씩 도와주고 배려해주면 학교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눈에 보이는 불편함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있다 보니 마음이 불편한 친구를 보는 일에는 좀 부족했다.


하루는 그동안의 슬픔과 결이 다른 괴로움을 느낀 적이 있다.


그날은 토요일 저녁이었고, 즐겨보던 예능을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아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세명의 친구들과 단톡 방에서 만날 약속을 정하고 있었다.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분기별로 한 번씩 볼 수 있을까 말까였다. 그런데 Y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야, 다 같이 만나면 또 나 도청하려고?"


순간 몸에서 열이 확 오르면서 10초 동안 가만히 핸드폰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도청?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도청을 해."


갑자기 단톡 방에 있던 다른 친구 S에게 전화가 왔다. Y가 언제부턴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이상한 질문을 하는 것도 모자라 맥락 없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1-2시간 동안이나 한다는 거였다.


나는 갑자기 너무 혼란스러웠다. 평소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Y가 왜 나를 지목해가면서 도청을 하고 있다고 의심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은 Y의 의심과 S의 이야기로 인해 정신이 어지러웠지만 어떻게 해서든 내가 도청을 하지 않는다는 근거를 쥐어짜 내면서 해명을 했다. 하지만 Y는 내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해명을 하고 있어야 할까?


결국 Y를 제외한 S, J와 그룹톡을 했고 긴급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맛있는 음식을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겠지만 그날 우리 셋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냥 Y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가볍게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도 많은 정황들이 드러나버렸다.


Y가 '도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나와 다른 친구들을 의심했던 일에는 Y와 함께 했던 약 8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무시하고 넘겼던 일들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고, 그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Y가 나를 의심하는 말의 근거는 이거였다.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내가 나머지 두 친구들보다 대외활동을 많이 하고 여기저기 사람 만나고 다니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내가 Y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내통하고 다니면서 Y의 깊숙한 얘기를 녹음해서 흘리고 다닌다는 거였다.


정말 또라이같은 말이었다.


나, S 그리고 J. 이렇게 세 명은 약 8년 동안의 시간을 되새김질해봤다.


Y는 대학교 시절 초반부터 좀 특이했다. 겉보기에 말도 안 되게 특이한 차림새를 한건 절대 아니지만, Y가 말하는 Y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했던 대부분의 말들이 거짓이었다. 우리는 Y의 개인적인 일까지 모두 확인하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그 친구의 말을 그대로 듣고 이해하며 살았는데, 믿음이 거짓이었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너무도 허탈했다. 심지어 대학 동기 중 다른 그룹에 있는 친구 D와 만날 때도 상식을 넘어선 이야기를 했다는데 미칠 노릇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S는 Y와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R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한번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좋을 거 같다는 톡을 남겼다.


4월 1일. 만우절.


정말 만우절처럼 거짓말 같은 날이었다.


Y와 중,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R과 H와 급하게 약속이 잡혔다. 나는 워크숍을 갔다가 집에 짐만 내려놓고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갔다. R, H, S, J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은 말도 안 되는 만남을 가졌다. 훗날 Y가 결혼이라도 하면 결혼식장에서나 잠깐 마주칠법한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심각하게 얘기를 하고 있으니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R과 H도 진작에 Y가 이상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가장 심해 진건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고, 얼마 전 R과 만날 때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내가 Y 도청을 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R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Y와 썸을 타고 있으며 내가 내통하고 있다는 상대와의 카톡 내용을 직접 확인해봤다.


근데 R이 직접 카톡 내용을 봤을 때 Y와 썸남이 전혀 주고받지도 않는 대화 내용을 사실처럼 지어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대부분의 일들 대부분이 거짓이었다는 사실로 밝혀지면서 우리는 각자 충격을 받았다.


친구는 어떠한 마음이 불편해져서 이 지경이 됐는지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우리는 과대망상을 넘어선 정신분열을 겪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에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수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시길...ㅠㅠ)


R은 우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Y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Y에게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이 되니 지금 당장 약속 장소로 나오라는 내용의 통화를 했다. 하지만 Y는 다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며 정신병자 취급하지 말라고 버럭 화를 냈다. 그러면서 자기 귀로 내가 인정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는데 왜 의심하냐면서 억울해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대체 Y의 귀에 대고 누가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분명 내가 그러고 있다고 누군가가 얘기를 했다는데, 그 보이지 않는 존재는 그 친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걸까?


아무리 Y의 마음이 불편하고 정신이 복잡한 상태라 할지라도, 자신이 만든 거짓을 진실로 믿고 있는 Y가 너무 미웠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슬픈 감정이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짓눌러버렸다.


그 만남이 있은 뒤로, 우리를 대신해서 R과 H가 Y의 어머니와 형제를 각각 만나 얘기를 드렸다고 했다. 하지만 종교의 힘을 믿고 있던지라 바로 병원에 보내지는 않았고 그냥 세상과 단절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듯했다. 그 후 몇 년 동안은 밖에 잘 나가는 일도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와 연락도 잘하지 않았다. 가끔씩 우리의 소식이 궁금했는지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Y를 자극하는 거 같아서 아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Y의 마음과 정신이 동시에 불편하다고 느꼈을 때,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점차 그동안의 모든 행동들이 퍼즐 맞춰지듯 조합이 되면서 큰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만큼은 아니었지만 짧지 않은 몇 년의 시간이 거짓으로 가득 찼다는 생각을 하니 허무하고 슬펐다. 어느 순간에는 나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 진건 아닌지 의심해가면서 불안함을 느꼈고, S와 J를 만날 때 내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미리 Y의 거짓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했던 많은 이야기들은 Y가 듣고 있는 게 아니라 Y의 귀에 대고 수군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그 존재는 Y의 생각을 온전히 지배했고 그들만의 세상으로 Y를 끌어들였다.


나는 이때부터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고, 신체 건강만 챙기는 게 아니라 정신 건강도 챙겨야 한다고 깨달았다. 옛 어르신들 중에는 정신력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말씀하지만 뇌는 생각 이상으로 정교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에 자기 자신을 믿고 열심히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과 마음이 힘들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어주는 것이 좋다.


또 어떻게 변할지 몰라 무턱대고 만나지는 못하지만


부디 몸도 마음도 건강하길...


우리 모두 정신 건강도 함께 챙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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