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했지만, 따스했다.
유럽 여행한다고 하면 제일 많이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소매치기 조심해!"였다.
어느 날에는 시칠리아 여행을 할 거라고 말하니, 생각도 못했던 '마피아'를 조심하란 말을 들었던 적도 있다.
몰타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서 안전한 편이기는 했지만 어디를 가나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범죄자들이 있었고,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들이 있었다. (더욱이 내가 있었을 때는 몰타에 난민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지만 점차 여러 문제점들이 터져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무리 치안이 좋은 한국이라 하더라도 남의 물건 훔치려는 사람들이 있고, 남을 해하려는 범죄자들이 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든지 남녀 구분할 거 없이 조심해야 한다.
나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지갑은 두 개로 분산시켜놨고, 여권과 여권사본을 늘 소지하고 다녔다. 핸드폰은 손에 꼭 쥐거나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품들은 미니 크로스백에 넣어서 분신처럼 매고 다녔다.
다행히 나에게는 위험한 일이 안 생겼다.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치근덕거리는 외국인 한 명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점차 마음이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 치타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버스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경찰서에 신고를 해놓은 상태인데 찾을 수는 있는 건지 절차를 다시 확인받기 위해서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다.
때는 주말이었고, 버스에는 축제에 가기 위한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치타는 늘 검은색 백팩을 메고 다녔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탄 탓에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맸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좀 빠져나가고 난 뒤 자신의 가방을 확인해보는데 지퍼가 열려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뒤져봤는데 자신의 지갑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다른 곳에서 흘린 것도 아니고 분명 그 버스를 타면서 지갑을 가방 속에 넣은 것을 스스로 확인했기 때문에 도둑이 정신없는 틈을 타 훔쳐간 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가까운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당황스러웠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도 언젠가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개인 보안에 철저히 하기로 다짐했다.
버스 내에 카메라가 있었다 한들 제대로 찍힐 리 만무하고 다수가 이용하는 버스 안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경찰들도 사건 접수만 할 뿐 별다른 대책은 없어 보였다.
치타가 바라는 건 지갑에 들어있는 돈이 아니라 지갑과 지갑 안에 들어가 있는 다른 소지품을 다시 돌려받고 싶어 했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그 안에 있는 소중한 추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었다.
이러한 치안 문제로 인해 고맙고도 민망했던 적이 있었다.
초반에 라라와 AMN, 안과 파쳐빌 클럽에 놀러 갔을 때 일이었다. 안은 한참을 놀다가 거의 끝물에 혼자 집에 갔고, 곧이어 나도 AMN과 라라한테 그만 놀고 집에 가자고 했다. 그때가 새벽이어서 버스는 끊겼고 걸어가거나 택시를 타야 숙소에 갈 수 있었다. 나와 라라는 슬리에마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생줄리앙에서 걸어가도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플로리안에 사는 AMN였다. 나와 라라는 걱정되는 마음에 AMN에게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니 택시를 타고 가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AMN는 라라와 나를 숙소에 데려다주고 알아서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새벽녘에 아시안 남자 혼자 길을 걸어가는 것이 불안해서 라라와 나는 우리 숙소 리빙룸에서 자다가 아침에 버스 타고 집에 가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우리를 숙소에 데려다 주기만 할 뿐 끝까지 거절하고 혼자 플로리안까지 걸어갔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괜히 늦게까지 놀았나 싶었다.
AMN은 일본에서 수의대생 연구원이었는데, 여자 동기생들에게 줄 액세서리를 고르는데 여자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 아니어서 원투원 수업이 없는 날에 둘이서 발레타 투어를 나서기로 했다. 우선 루드윅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기 때문에 먼저 카페에 가서 숙제부터 끝내기로 했다. 나는 음료를 시켜놓고 계속 딴짓만 하다가 겨우 숙제를 끝내고 난 뒤에도 날씨가 춥다면서 급 쇼핑몰 의류 스파 매장에 가서 스카프와 후드 집업을 구입했다.
오후 5시를 넘기기 직전에 본격적으로 실버 아이템 구매를 위해 액세서리 집 탐방을 시작했다. 다른 보석처럼 화려하거나 반짝이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목걸이나 팔찌들이 많았다.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디자인으로 된 것들을 3종을 골라준 후 AMN은 포장과 계산을 마쳤다.
갑자기 AMN이 배고프다면서 음식점에 가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이대로 집에 가서 다리 쭉 뻗고 쉬고 싶었는데, AMN은 내 숙소와 가까운 슬리에마 음식점을 찾은 후 같이 가자고 말했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거 같아 결국 Sciantusi라는 음식점에 갔다.
음식을 다 먹고 나온 뒤에 소화도 시킬 겸 AMN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주변이 밝은 큰 도로가를 통해서 조금만 걸어가면 숙소가 나왔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AMN은 이때도 거절을 했다.
늦은 저녁에 혼자 걸어가게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응?!
나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여기서는 둘 다 외국인으로서 밤길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데려다 줄 필요 없다고, 버스 타고 빨리 집에나 가라고 말렸다. 갑자기 그때 AMN이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자신 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친구 사이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common sense'야."
그때까지 일본 사람들은 이런 배려도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해서 서로에게 common sense를 발휘하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런데 나의 고정관념이 조금 깨지는 순간이 이렇게 찾아왔다.
여하튼, 이 정도의 호의를 받을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고맙고 미안한 순간이었다.
수업을 듣다가 루드윅 선생님을 통해 부활절 행사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부활절 행사가 지역 곳곳에서 열리는데 몰타에서 가장 큰 모스타 성당 앞에서 열리는 행사가 가장 볼만하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헤이미의 제안으로 그때 당시 클래스 메이트인 일본인 RM과 벨기에인 J와 함께 모스타 성당 앞 축제를 즐기기로 약속했다.
우리 넷은 행사 당일이 돼서 모스타 성당 앞에서 만나 축제를 즐겼다. 축제가 진행되는 내내 서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앉아서 쉴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많이 지친 상태였다.
발레타로 향하는 버스에 겨우 몸을 실었다. 헤이미는 발레타에 숙소가 있어서 종점에서 내리면 됐고, J도 숙소가 발레타 근처에 있는 그지라여서 종점 직전에 내려서 걸어가기만 하면 됐다.
문제는 RM과 나였다. 종점으로 가기 직전에 버스를 갈아타야만 했는데, 슬리에마로 가는 버스 모두가 내리는 사람 없이 타야 할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버스 정류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나는 하루 종일 걸어 다닌 탓에 혼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너무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지역 곳곳에서 부활절 행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모든 길이 혼잡했다. 환승할 버스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나는 RM과 J에게 그냥 혼자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그냥 보내줄 줄 알았는데 RM도 같이 걸어가겠다고 했고 J는 내가 길치에다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서 불안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우리 둘을 따라나섰다.
RM네 숙소는 슬리에마 중심부였다. J가 거기까지 같이 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RM네 숙소 근처에 도착했을 때 J에게 이만하면 됐으니 잘 가라고 인사했다. 하지만 평소 과묵한 J답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반대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며 저기서 아무거나 타고 집에 가라 해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냥 괜찮다는 몇 마디 말만 하고 계속 같이 걷기만 할 뿐이었다.
J와 둘이서만 걸어가다가 우연히 J의 친구인 커플 한쌍을 만났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는 옆에서 그들의 말 몇 마디에 맞장구를 해주면서 서 있었는데, 갑자기 그 친구 커플이 J에게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냥 질문을 쿨하게 씹었다. / 정말 어떠한 일에도 별 내색을 하지 않는 성격인 듯...)
내가 그 뒤로 집에 잘 돌아갔냐고 물었지만 단답으로 대답하고 대화를 끝내버리는 J의 차가움에 얼어버릴 뻔했다.
J가 AMN처럼 common sense라던가 아니면 일반적인 배려라는 등의 이유를 말해줬으면 좋았으련만...
다른 이유를 말하지도 않으면서 계속 같이 걸어주기만 J 덕에 너무 어색하고 힘들었다.
그래도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그때까지 외국인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같은 방향이 아닌 이상 데려다주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모두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표현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 내가 만난 외국인 친구들은 배려심이 넘쳤고 너무도 친절했다.
오히려 내가 친구들에게 싹퉁머리 없이 군건 아닌지 뒤늦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새로운 친구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법은 만남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을 다해서 행동을 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누굴 만나든 진심을 다하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안전한 듯 안전하지 않은 몰타의 치안 덕에 몇 가지 경험을 하게 된 썰 끄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