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꿈을 궁금해해 본 적이 있나요? 아마 대부분 없을 겁니다. 아버지는 늘 아버지였기 때문에, 혹은 무던한 자식이기에, 혹은 이미 이루거나 실패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묻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꿈꾸는 시절이었을 청년 태용씨를 한 번쯤 함께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분명히 꿈 많고 야망 있는 청년이었을 그 시절을요.
청년 태용씨는 아버지 소봉씨의 영향으로 시공기술자를 꿈꾸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부산공업전문학교 건축과에서 공부를 하던 중, 군입대를 하게 됩니다. 태용씨는 군생활 중 건강에 문제가 생기게 되지요. 우측폐하협에 공동이 생기고 출혈까지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폐를 1/3 가량 절제해 내는 수술을 받고 의병 제대하기에 이릅니다. 소견상으로는 일반인 폐 기능의 30%를 소실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또한 이는 '시공분야'를 지원하는 20대 청년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태용씨는 메이저 시공사에 입사지원을 했지만 최종적으로 건강검진 결과가 문제가 되어 불합격이 반복됩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현장을 관리할 건강한 인력이 필요했겠지요. 그렇게 태용씨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설계 분야로 진로를 틀게 됩니다. 태용씨의 진로는 '건강'이라는 중대한 요소 앞에서 살짝 길을 비껴가야 했던 것이네요.
이왕 시작한 설계일,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해보고 싶은 욕심도 컸고요. 석사 진학도 고려했을 만큼이요. 하지만 이번에는 '돈'이라는 또 다른 중대한 요소 앞에 학업계획은 무기한 연기됩니다. 당시에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던 태용씨에겐 고향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선택지밖에 없었거든요.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한 분야에서 30년이 넘는 시간을 일해왔습니다. 직업인으로서는 지겹도록 오랜 세월을 지나왔겠지요. 그러니 직업을 차치하고서 태용씨의 꿈을 묻습니다. 태용씨의 야무진 손끝이 대변하듯 태용씨는 '만들기'를 참 좋아합니다. 지금처럼 'N잡러'와 '부캐' 가 그 시절의 트렌드였다면, 태용씨는 표구사를 운영하는 건축기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액자, 활, 화살 만들기 같은 분야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고, 취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둘 다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째 일맥상통하기도 하고요.
사실 태용씨의 꿈은 과거형이 아니고요, 현재 진행형입니다. 목공예는 지금도 해보고 싶은 꿈이라고 힘주어 말하거든요. 집을 지어 이사 간다면 자신만의 작업실을 갖추고 목공예를 마음껏 할 참입니다. 도마도 만들고, 의자도 만들고, 식탁도 만들고요. 이 취미가 또 다른 직업이 된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일흔의 태용씨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나무 냄새를 만끽하며 취미를 즐길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랍니다. 아참, 공방 이름은 이미 내가 다 지어놨으니 걱정 마시고요.
"콧수염 할배의 목공방 하믄 되겠네!"
태용씨의 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내가 여러모로 겹쳐 보입니다. 나 역시 태용씨로부터 영향을 받아 건축사의 꿈을 꾸고 건축설계를 전공한 후, 이런저런 이유로 건설사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손재주도 물려받아 이것저것 만드는 데에 취미가 있습니다. 휴, 정말이지, 피는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