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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언 Dec 07. 2022

태용씨의 문장들

   나의 어린 시절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부모님께 편지를  의무적으로 썼었지요. 큰 문제가 없었다면 태용씨가 수신했을 겁니다. 이후에도 태용씨와 경애씨의 결혼기념일, 생신에 짧게나마 카드를 쓰기도 했고요. 생각해보니 나의 일방적인 발신은 계속되었지만 그에 대한 회신은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박준 시인은 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서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편지를 쓰기만 하고 회신을 받지 못한 나는 짝사랑을 한 걸까요?


  일일이 답장을 받지 못한 건 맞습니다만, 나는 분명하게 회신을 받았습니다. 어느 특별한 날, 가장 선명한 방법으로요. 바로 나의 결혼식, 형식은 덕담문이었지요. 주례 없는 결혼식을 결정하고, 태용씨께 덕담을 부탁합니다. '파워이과'인 태용씨에게 문장을 쓰는 일은 부담이라 생각했기에, 초안을 잡아 보냈습니다. 얼마 후, 예상외로 태용씨는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덕담을 보내왔습니다. 태용씨만의 문장들이었지요. 어떤 밤, 끝방에서 딸에게 읽어줄 문장을 쓰고 고치는 태용씨의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귀한 보물 재은아, '로 시작하는 문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었지요. 흔한 문장일 수 있지만 내 귀를 통해 들어와 마음에 가만히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어요. 결혼식, 몇 분도 채 되지 않는 덕담을 위해 수없이 연습했다고 하지요. 아내 경애씨가 덕담 첫머리가 지겨워질 만큼 눈만 마주치면 외웠습니다. 원고를 보고 읽으면 되기 때문에 외울 필요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말하기 위해서는 외우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유난히 감정적이고 예민한 딸인 나는 자주 우울해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운이 나만을 저격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환경을 완전히 바꿔보기로 마음먹습니다. 나고 자란 부산에서 멀리 떠나보기로요. 그렇게 서울로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 정신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우울감도 차츰 줄어들길 바라면서요.


  부산 본가에 두고 온 서류가 몇 가지 있어 태용씨에게 메일로 전달을 요청했습니다. 태용씨가 보내준 파일을 급히 받아 제출했기 때문에 내용이 있을 거라곤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필요한 자료 때문에 태용씨의 메일을 검색하고는 마음이 저릿해졌어요.


이태용 <madanga@empas.com> 2020년 2월 12일 (수) 오전 8:40

[가족관계증명서]

즐거운 하루


이태용 <madanga@empas.com> 2020년 2월 14일 (금) 오전 9:51

[통장사본]

오늘도 즐겁게


"즐거운 하루!", "오늘도 즐겁게!". 우울한 날들을 떨쳐버리려 발버둥 치는 딸에게 보낸 메시지였겠죠. 멀리 생각하지 말고 당장 오늘을 즐겁게 보내길 바라는 태용씨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짤막한 메시지만큼 딸의 마음이 가볍고 간결해지길 원했는지도 모르지요. 저는 이 두 통의 메일을 보관함에 잘 저장해 두기로 했습니다. 행여나 삭제되지 않게요.


멋진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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