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화가 나도 약속은 지키자

우리 싸움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룰에 관해

by 랑끗

“우리 약속 하나만 하자.”

연애 초기에 한번 투닥거리고 난 뒤, 당시에는 남자 친구였던 남편이 갑자기 말했다.


“뭔데?”

도대체 그게 뭐길래 저런 비장한 표정을 짓나 싶었던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영영 이별하고 싶다고 느끼기 전까지,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는 거.”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정말 헤어지고 싶으니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그럼 언제 하는데?


이 의문은 뒤따라온 남편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 길게는 100일 남짓, 짧게는 한 달 정도 연애를 수없이 반복했는데, 매 연애마다 차였다고 한다. 그래서 헤어짐에 관한 트라우마가 있단다. 내가 봐온 바로는, 남편이 그렇게 될 만한 큰 문제는 없었는데.


그리고 내가 헤어짐을 고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은 정말 그때 딱 멈출 것이기 때문에 란다.


불쑥 이런 냉정한 말을 꺼내는 그가 조금 야속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도 단순히 사랑을 더 받고 싶다는 표현으로 ‘우리 헤어져’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면 전 여자 친구들이 그런 의미로 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순간, 그때 정말 끝인 걸로 알 거야.”

유들유들한 성격에 나한테 자주 져주던 그가 꽤 단호하게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허투루한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들으면 성격이 되게 칼 같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에 나는 굉장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그때 했던 약속이 지금까지 우리의 관계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나 싶다.


만약 상대를 굽히게 만들기 위해 이별을 언급한다면, 둘 사이에 그만큼 파괴적인 말이 없을 것 같다. 또 처음에는 꽤 세게 작용하던 협박은, 그 사용수가 빈번해지면서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결국 상대방으로 인해 "또?"라는 반응을 일으키며 심각성을 잊게 만들지도 모르고.


연애 기간 2년 남짓, 결혼 생활 3년 차인 지금, 남편이 내게 꺼낸 약속은 아직 유효하다.

나는 아무리 화가 나도,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도 그에게 헤어지자, 이혼하자라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그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남길 거라는 걸 알고, 아무리 홧김이라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으니.

또 그걸 정말로 바란 적도 없었으니.


이 대화가 없었다면, 둘 사이에 이러한 약속이 없었다면 첫 연애에 어리고 서툴던 나는 어쩌면 홧김에 헤어짐을 언급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게 내가 주도권을 되찾는 방법인 줄 알고.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헤어짐을 바라지 않는 이상, 둘 관계에 이 말은 주도권 싸움이고 뭐고, 관계에 굉장히 파괴적인 말일뿐이다.

연애 초에 남편이 먼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아픔에 관해 잘 설명해 주었기에, 이 약속을 지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두 번째 룰.


내가 제안해서 지키게 된 또 한 가지의 약속이 있다.

싸우고 나서 아무리 화가 나고 상대방이 꼴 뵈기 싫어도 집은 나가지 말기.


이 약속을 하게 된 계기는 신혼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어떤 이유로 싸운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자존심을 세우며 둘이서 피 터지게 싸운 후 화가 난 남편은 갑자기 밤늦게 나가서 아침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나가는 걸 알았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가 이 늦은 시간에 어디 가냐고 묻기에는 자존심 상하니까.


처음에는 언젠가 돌아오겠지, 갈 데가 어딨어라며 자존심을 세우며 화를 삭이다가, 밤이 지날수록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때 당시 학생이었던 남편은 건전하게 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고 한다). 그다음 날 서로의 화가 가라앉고 대화가 가능할 때쯤, 대화로 모든 걸 푼 후 나는 남편이 연애시절 그랬던 것처럼 말을 했다.


“약속 하나만 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자리를 떴던 남편은, 그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잘못했다 순순히 인정하고 순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아무리 화가 나도 아무 말 없이 집은 나가지 않기로. 아니, 그냥 화가 완전히 풀리고 화해하기 전까지 집을 나가지 말아.”

물론 나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한 것을 가끔 후회할 때도 있다. 자존심 세우면서 지나가던 초등학생이 유치하다고 비웃을 정도로 싸워댄 뒤, 그 상대와 함께 한 집에 있는 것이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한 일이다. 게다가 생활 반경이 겹칠 때는 더더욱.


자존심은 세우고 싶은데, 상대방은 꼴 보기 싫고. 그렇다고 먼저 말 걸자니 지는 것 같고, 또 여기서 더 화를 내자니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좁은 집에서 상대방을 만나면 죽을 것처럼 피해 다니다가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다시 되돌아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상대방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뭐하다.


그렇게 집에서 불편한 몇 시간을 견디고 나면, 활활 타오르던 화가 결국 사그라든다.

자연스레 계기가 생겨 대화가 시작된다.

물흐르듯 사과하고 화해한다.


감정 때문이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하게 되는 유치한 말꼬리 잡기 대신, 어른 대 어른으로서 대화가 가능해진다.


그렇게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의 싸움은 밤을 넘기지 않게 되었다.


이것 외에도 결혼 후, 수많은 싸움으로 인해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큰 것까지 우리는 약속을 많이 했다.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꿈꾸며 만들어진 규칙이 아닌, 현실에서 직접 싸워보고 만든 약속들은 좀 더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 약속을 만들게 된 원인을 제공한 싸움을 우리 둘 다 잘 기억하니까, 똑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말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약속이다.

그리고 서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속을 통해 그어놓은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애쓴다.


부부싸움을 할 때 내가 얼마나 화가 났든지, 내 감정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감정도 중요하다는 생각과 상대방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된다는 생각은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아무리 가까운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화가 날지라도 서로 사이에 넘어야 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서로에게 알리는 것도 좋다.


물론 선을 그어놓고, 약속을 한다고 해서 매번 그게 잘 지켜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서로를 위해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또 부부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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