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초등학교 전학은... 열 번 정도?

by 은은한 온도

엄마가 아빠에게 끌려가서 맞은 뒤로 몇 년간 우리 가족은 모 함께 살았다. 엄마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는 처음에 가족이 모두 집에 다는 사실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가까운 곳에 엄마가 있고 나도 다른 집 아이들처럼 가족 구성원이 온전히 존재하는 가족으로 산다는 느낌이 좋았다.


오산의 회색 건물 떠나 우리 가족은 시골로 옮겨갔다. 반에 엄마 아빠는 농장에서 일했다. 돼지농장에서 닭 농장으로 또다시 돼지농장 등으로 농장들을 전전했다.


첫 번째 농장에서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농장은 보통 도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던 시대가 아니어서 엄마는 교직전 대 선임이 등성명을 묻듯 늘 우리 집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리고 나는 내 몸 만한 가방을 메고 군기가 잔뜩 들어 대답했다.


"우리 집 전화번호가 뭐라고?"

"000-000-0000!"


"우리 집 주소는?

"경기도 000 000 000 번지 "


"길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하라고?

"경찰서에 가서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경찰서를 못 찾겠으면 어떻게 하라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경찰서가 어딘지 물어본다!!"


"잘했어, 혹시라도 길 잃어버리면 경찰서 가서 엄마한테 전화해. 엄마가 데리러 갈게. 학교 잘 다녀오고!"

"응, 걱정 마 엄마!"


지금 생각하면 8살짜리 혼자 30분동안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일이 말도 안 되지만 그땐 그랬다. 는 엄마 없이 매일 긴장 속에서 버스를 탔지만 또 그게 내 나름대로는 른이 된 것 같아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가족이 그대로 행복하게 살 줄 알았. 그리고 내가 그렇게 전학을 많이 다닐 줄도 랐었다.




초등학교 1학년 3번 전학 및 이사

초등학교 3학년 3번 전학 및 4번 이사

초등학교 4학년 2번 전학 및 이사

초등학교 5학년 3번 전학 및 이사


나는 바뀐 환경에 굉장히 적응을 잘한다. 새로운 집단이 있으면 카멜레온처럼 그 집단의 색에 맞춰 변모가 가능하다. 솔직히 무인도에 떨어뜨려놔도 그 섬에서 잘 살 자신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엄마 아빠의 공식적 이혼 있던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5년간 약 10번 정도의 전학을 다녔다. 이사가 아니라 전학이었다. 아예 모든 터전이 다 바었다. 집이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사는 지역, 다니는 학교, 정든 친구들, 인사하던 이웃, 익숙했던 주변 풍경까지 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늘 한 치의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들이닥쳤다. 하교를 하고 집에 오면 갑자기 며칠 뒤에 혹은 내일 이사를 가야 한다는 식이었다.


전학의 이유는 대부분 아빠였다. 아빠는 늘 가는 곳마다 소음을 만들었다. 사람들과 싸우는 것 다반사였다.


별 수없었다. 나는 어렸지만 똑똑한 딸이었기 때문에 아빠를 알고 우리 집 상황을 다 알았다. 엄마라고 한들 이 번거로운 이사를 매번 가고 싶었겠는가. 그래서 나는 엄마한테 전학 가기 싫다고 떼를 부린 적도 없었다.


전학 첫날에는 언제나 외롭고 두려웠다. 상어 떼가 우글거리는 망망대해에서 혼자 뗏목을 타고 덜렁 놓아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두려웠지만 외로운 건 더 싫었다.


다행히 나의 밝음은 효과가 있다. 나는 친구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눈치도 탑재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기술을 통해 친구들의 이야깃거리 속으로 매끄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늘 잘거렸고, 반장도 으며, 여러 가지 상을 받는 훌륭한 학생로 학교생활을 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전학으로 나는 무력해졌다. 어차피 열과 성을 다해 친구를 사귀고 마음을 나누어도 어느 날 갑자기 헤어져 연락이 끊기는데 어떻게 의욕적이겠는가.


더군다나 일시적 고아 상태였던 초등학교 4학년은 이 무력한 마음이 절정을 치달았다. 이때 나는 실험을 해보았다.


'과연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처참했다. 말 걸지 않는 나에게 먼저 인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은따였고 내 동생은 왕따였다. 무도 나와 놀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 동생은 더 심했다. 내 동생이 책상 밑에 쭈그리고 들어가 있으면 같은 반 친구들이 책상을 에워싸 쿵쿵거렸다고 했다. 나는 이 사실을 성인이 돼서야 알았다.


그때 나와 내 동생은 학교에서의 일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았다. 그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이 없음을. 그리고 학우들도 알았다. 우리를 지켜 줄 부모가 없다는 것을.





거쳐갔던 집들 중엔 강렬한 기억을 지닌 집도 있고 아예 기억 속에서 삭제되어 버린 집들도 있다.


산속에 둘러싸인 집에서는 옆에 있는 젖소농장에 놀러 가 그 집 아주머니가 젖 짜는 걸 구경하곤 했다. 막 짜낸 비릿한 우유를 얻어마시기도 했다. 그 집에서는 공주 드레스를 입고 친구들과 생일파티도 했다.


크고 얇은 플라스틱 널빤지 지붕의 집에서는 동네 거지 아이에게서 이를 옮아와 한동안 애를 먹었었다. 간지러운 머리를 참빗으로 빗으면 작고 하얀 이가 투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엄마는 떨어진 이를 양 엄지손톱으로 짓이겨 죽였다.


기차처럼 긴 건물의 집도 있었다. 1년 넘게 살았던 그 집은 엄마가 닭 농장에서 근무할 때였다. 엄마는 가끔 병아리를 집으로 데려왔고 나와 내 동생은 그 병아리를 대야에 넣어 목욕을 키기도 했다. 날이 좋을 땐 개울에 가서 물장구도 치고 개구리도 잡고 물뱀을 보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마당이 있는 집도 있었다. 그 마당에서는 어른들이 몸보신한다고 농장에 있던 돼지를 망치로 때려잡기도 했다. 엄마가 애들은 보는 거 아니라고 나와 내 동생을 방으로 쫓아내도 꾸엑하고 들려오는 돼지 멱따는 소리지 막을 순 없었다.


동생 얼굴에 바퀴벌레가 기어 다녔던 어두운 시멘트 단칸방도 있었다. 침대 하나가 가장 끝에 위치해있었고 열 발자국 정도 되는 반대편 끝에는 철문으로 된 천장이 낮은 화장실이 있었다. 세로로 길었던 그 집에서는 학교도 가지 못했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넓은 지하집에서는 장마 때 정강이까지 물이 차기도 했었다. 해충이 나타나면 나와 동생은 호들갑을 떨며 에프킬라를 뿌렸고 죽은 벌레를 들고 나 가지 못해 서로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나쁜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홍등가를 지나 따닥따닥 붙어있는 주택의 지하에서는 소소한 행복도 있었다. 동생이랑 엄마를 마중 가면 엄마가 길목에 있던 가게에서 3000원어치 탕수육을 사주었다. 저녁 대신 그 탕수육을 먹으며 우리 셋은 도란도란 루의 일과를 얘기다.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면 물건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짐 덩어리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물욕이 없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물질보다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물음의 답을 찾는 일이 나에게는 훨씬 중요했다.


내 삶은 나에게 영원한 것은 없다는 명제도 선사했다. 지금 행복해도 당장 내일 불행해질 수 있었고, 오늘 뜨겁게 아파도 다음 날은 웃음을 자아내는 하루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알았다. 그렇기에 나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미래보다는 당장에 주어진 현재 충실하게 사는 사람로 살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