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증이 없으면 우겨라

자백하면 봐준다면서요

by Enero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엄마 지갑에서 5,000원이 없어졌다.

엄마는 나와 누나를 나란히 앉혀 놓고 손에는 효자손을 쥔 채 말했다.


"누가 그랬니? 지금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용서해 줄게."


용서해 준다는 말에 이실직고했다.

"사실 제가 그랬어요. 오락실 가고 싶어서요."


자백하면 봐준다더니, 엄마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를 끌고 방에 들어가 그 효자손으로 내 엉덩이를 때렸다. 엉덩이에 날아드는 아픔보다 마음에 꽂힌 배신감에 더 화가 났다.


"솔직하게 말하면 봐 준다면서요!"

"거짓말했으면 더 맞았을 거야."


엄마는 내가 실토하기 전까지 나와 누나 중 누구인지, 아니면 본인 스스로 어디다 깜빡한 건지 알지도 못했으면서. 심증만 갖고 우리 둘을 유도신문했고 나는 거기에 당했다.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은 '이제부터 엄마 지갑에 손대지 말아야지.' 보다는 '앞으로는 자백하지 않을 거야.'에 가까웠다.

그래서 결국 한 번은 내가 엄마 지갑에서 훔친 만 원짜리 한 장 때문에 누나가 맞았다.




"너 어제 술 마셨지?"


24살, 제대 후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저 술자리가 재밌을 때였다.

거기에 낯선 여자까지 껴있으면 '역시 사회가 최고야!'를 속으로 외쳤다.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기다려준 여자 친구에겐 미안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놀고는 싶은 마음에 거짓말을 했다.


나이트클럽에 가기로 친구와 약속한 날. 그 전날부터 계속 몸이 으슬으슬 아프다고 밑밥을 깔았다. 그리고 당일, 저녁 9시부터 약기운이 올라와 자야겠다고 메시지를 남기고 신나게 술을 마셨다.

걸릴 일도 없고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세나의 눈이 확신에 가득 차 있어 지레 겁을 먹었다.


"미안해, 하도 정훈이가 놀자고 해서. 그냥 정말 조금만 마시고 놀다 오려고 했는데..."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나가 몰아치듯 화를 내서 그저 싹싹 비는 것 말곤 내가 살아남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분명 마주친 사람도 없었고 겹치는 지인도 없는데 도대체 세나는 어떻게 안 걸까?

그날 이후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세나가 거는 영상 통화를 받고, 친구들과 만나면 인증샷을 찍어 보내야 했다.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 이야길 하니, 그냥 딱 잡아뗐으면 넘어갔을 일이라 했다.

흔히 말하는 '여자의 촉'은 결국 본인의 지난 경험과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쌓은 빅데이터가 가동할 때 발동하며,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경우가 많단다.

이 심증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를 '떠보는' 멘트를 날리고, 여기서 말려들면 증거도 없이 스스로를 범인으로 내몰게 된다.


엄마가 증거도 없으면서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 자백하게 만든 것처럼, 그때도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죄로 엉덩이를 맞듯, 나는 내 개인 시간과 자유를 세나에게 반납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수연이 나를 떠보는 줄 알았다.

"너, 정말로 다른 여자 만난 적 없어?"


한 달 전쯤이었을까, 카페에서 너무 아름다운 여성분을 봤다. 자기 방어를 위해 변명을 덧붙이자면 옆에서 부추기는 친구 놈들 때문에 슬쩍 가서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리고 몇 번 연락을 주고받았고, 데이트 같은 걸 좀 하긴 했다.


그래도 수연이 활동반경 내에는 진입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내가 봤을 때엔, 세나가 그랬던 것처럼 수연이 머릿속 빅데이터가 알파고보다 빠르게 돌아 촉이 발현했다. 그래서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아니? 내가 그럴 일이 어딨어."


억울한 느낌을 주는 헛웃음과 '나는 너에게 진실만을 고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 확신에 차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내가 생각해도 완벽했다.


"정말? 단 한 번도? 나 똑바로 보고 그런 말 할 수 있어?"

"응.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이래?"


분명 정말로, 나는 눈동자를 굴리지 않았다. 그래서 확신했다.

'이번에는 내가 안 넘어가지. 물증도 없으면서 감히 심증으로 나를 몰아붙이려 하다니!'


내 손 앞에 놓인 수연이 휴대전화 화면 위에는 손을 다정히 잡고 걷는 남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앞으로 굴러 좌로 굴러 물구나무를 서서 보아도 그냥 나다.




"딱 한 번이었어. 미안해."

결국 눈알이 구르다 못해 땅으로 꺼졌다.

도저히 수연이 얼굴을 더 볼 자신이 없어 카페 나무 바닥의 빗금만 세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딱 한 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네. 뒤에서 바람을 핀 것도 모자라 지금 뻔뻔하게 내 눈을 보면서 거짓말까지 해? 너랑 나는 여기서 끝이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수연이 손목을 잡자 그녀가 홱 뿌리치며 말했다.

그냥 자백해서 정상참작이라도 받아냈어야 했나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참고하라고 말하는데. 거짓말 안 하고 솔직하게 말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자백하면 참작해주고 감형을 '네고'해 주는 건 경찰과 법 밖에 없나 보다.

여자에게는 내 죄를 자백해도 이 나쁜 죄질은 용서받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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